햇살한줌 마음한꼬집

겨울 털기

by 여름지이

최근에 알게 된 '코모레비'라는 단어는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일본말로 영화 <퍼펙트 데이즈>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다.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오늘만을 사는 주인공 히라야마의 삶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나라가 어이없고 개인적으로 게을렀던 겨울을 보내며, 단어로 정의하지 않았어도 지나고 보니 코모레비 같은 날들이 있어 또 봄을 맞을 생각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얼었던 땅이 포슬해지고 생명이 움트는 힘센 봄의 일에 진동을 하는 것이 이제는 쉽지 않으니. 모두의 코모레비를 응원하며.



<<여름 양말>>

순면 여름 양말 하나가

겨울날 실내에서

가볍게 발을 포근히 감싼다

구멍이 숭숭인 패턴

기특도 하지.

새미물처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은 따듯한

쓸모 있는 오일장 천 원짜리 양말.

양말을 파는 아낙네는 난전을 펼쳐놓고 자주 자리를 비우더라

아무리 물건을 들었다놨다해도 군소리 없더라

옷 입기가 불편한 언니가 있어요

편하게 입을 잠옷바지 있을까요

아낙의 눈빛은 이미

모르는 이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서

성의를 다하여 이것저것 골라준다.

한파가 몰아친 날

이젠 오일장 전포들 구멍이 숭숭

아낙네 가게는 그 여름날처럼 한산하다

습관처럼 기웃거리다

이것저것 들춰 보지만

또 습관처럼 주인은 없다

떠들썩한 장터에 고요한 그곳.





<<메기를 닮은 섬>>

양강섬으로 산책을 갔다가, 무심코 발길은 부교 다리를 건너 양근성지로 향했다.

성소는 언제나 이끌고 머물게 하는 뜻을 비춘다.

그 공간에 들어서면 고요해지는 마음.

경건한 몸가짐과 저절로 되는 합장으로 장소의 의지에 스며든다.

웅장한 예수상을 돌아 앉으면 보이는 떠뜨렁섬.

작은 의자의 방향은

성당 마당에서 볼 수 있는 떠뜨렁섬의 사계를 소개하는 듯하다.

지금은 겨울이다.

한 마리 메기를 닮은 작은 섬.

한컷에 담기지 않아 나누어 찍어 연결해 본다.

얼추 맞아떨어졌다!

마침내 속이 훤히 드러났네.

무인도 같은 곳에 경작의 흔적이 보이기도

무엇보다 저곳에서 울려 퍼지는 새들의 지저김이 아이들 노는 소리 같다.

잿빛 겨울날 초록 같다.




<<한강의 해부극장>>

소설가 이전에 시인이었다는 한 강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는다.

한강의 소설을 시 같다고 했다. 유일하게 읽은 소설 <희랍어 시간>을 읽고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러면 시는.. 일상의 코모레비와 심연의 조각들을 뜻밖의 연결과 상상으로 차가운 피처럼 따뜻한 피처럼 (말을 걸기보다)마음을 건다. 그중 하나,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해부학자 안드레아 베살리우스의 책에서 영감을 얻었나 보다. 독특한 구도의 해골 그림들이 실려 있다는.


해부극장


한 해골이

비스듬히 비석에 기대어 서서

비석 위에 놓인 다른 해골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섬세한

잔뼈들로 이루어진 손

그토록 조심스럽게

가지런히 펼쳐진 손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이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을 들여다본다


(우린 마주 볼 눈이 없는걸.)

(괜찮아, 이렇게 좀 더 있자.)

어쩌면 육체는 껍데기, 우리는 뼈로 말해요!

아니면 마침내 뼈라도 닿여야 되는 존재들, 그렇게 위로받는 존재들?


뒤편에 실린 조연정이라는 사람의 해설에 이런 구절이 있다.

각자 지니고 있는 영혼의 순도나 크기와 무관하게 인간은 누구나 영혼의 부서짐을 어떤 형태로든 겪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영혼의 부서짐에 대해 애초에 둔감하거나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한다. 아마도 평범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서일 것이다. 영혼의 부서짐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일도,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일도 쉽지는 않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은, 영혼의 부서짐을 마주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의 여정은 아닌지.

실눈으로 엿본 세상 두 눈 꼭 감아버리는

점점 우리는 무탈한 하루를 기원하고

그것이 평범하고 건강한 삶이라고

사회는 말하고 우리는 따르는 분위기다.

예민하고 직시하는 일은 힘들고 어려우니까.

한강의 소설이나 시에는 평범하고 건강한 삶이라곤 없다.

그래서 나 같은 겁쟁이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문학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 몹시도 궁금하지만.. 그곳에서 길을 잃고는 울 것만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약하디 약한 영혼들에게 문학의 언어들은, 한강의 언어들은 위로를 건넨다.

어떤 다정한 위로의 말보다 말라버린 딱지 아래를 거울처럼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위로인지 모르니.

나아갈 수밖에 없는

나를,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끝나지 않은 생에 대한 예의라.





<<빛, 빛들!>>

오지호 <남향집>, 1939년 캔버스에 유화, 80x65

보기만 해도 절로 따끈한 햇볕의 온기가 전해져 오는 이 그림을 남도의 작은 도시 광양에서 보고 왔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이지만 전남도립미술관이 있는 광양으로 나들이 온 것이다.

나들이 제목은, 오지호와 인상주의 <빛의 약동에서 색채로>!

누구 그림인지도 모르고 이미지만 품고 있었는데, 사실은 품고 있는지도 몰랐다.

우연히 고향집에 갈 즈음 그림에 관련된 정보와 전시회 소식이 한꺼번에 들어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 잡힌 일정을 수정해 가며 달려갈 채비를 하는 내 모습을 보며 그렇다는 걸 알았다. 남향집, 남도, 2월.. 모은 듯 어울리는 세 가지 요소? 는 봄을 기다리는 이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서양화가에게만 인 줄 알았던 ‘빛의 화가’라는 칭호를 받는 한국인상주의 대가 오지호(1905~1982) 화백.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는 놀라운 발견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유학하고 서양화풍을 계승했으나, 오로지 그는 이 땅의 자연과 풍토를 주제로 한국적인 인상주의를 개척하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구현한 화가였다.


오지호 <임금원(사과밭)>, 1937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회화는 빛의 예술이며 빛의 약동, 색과 생의 환희, 자연에 대한 감격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천명한 그의 그림에는 그림자마저 다채롭다. 그저 무채색으로만 생각한 그림자를 보랏빛, 저 멀리는 초록빛으로까지 표현한 그때 눈부신 5월의 현장은 이러하다. "꽃도 희고, 햇빛도 희고, 휘영청 밝은 오월 초순의 임금원 색채의 혼탁을 피하기 위해서 점묘적 수법을 썼다." 화가는 일 년을 벼른 사과밭에서 주변 왱왱거리는 벌들처럼 무아지경이 되어 그림을 땄다.

인상주의 화법이 정점을 이룬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두 그림의 운명은 엇갈렸으나, 무려 40년 만에 화가 탄생 120주년 기념 회고전에 함께 전시된 것이다. 빛에 의해 약동하는 봄기운이 어느 곳보다 이른 화가의 고향(화순) 남도의 미술관에서.


미술관에서 나와 차를 몰아 멀지 않은 섬진강 다리 하나를 건넌다. 내 고향 하동이 시작되고 방풍림으로 조성되었을 울창한 소나무 숲은 나타나고.

숲 속의 그림자들, 사이 빛들, 반복되는 자연현상이나 한시도 같지 않을 코모레비의 현장이다.


온 누리에 펼쳐진 그날의 태양빛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공평하게 품었다.

하동쪽에서 본 다리 건너 광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