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우주론이 밝힌 시간 척도와 비슷한 크기의 척도로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유일한 종교는 힌두교다. 힌두교의 우주론은 영원히 순환하는 우주이다. 11세기에 만들어진 촐라 왕조의 청동상은 힌두교 신들 중 하나인 시바 신이 우주의 새로운 주기가 시작할 때마다 이루어지는 창조를 춤으로 형상화한 모습이다. 영원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여 새로운 주기가 열릴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코스모스, 바로 인도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우주의 실상이다.
지금부터 138억 또는 137 억년 전 ‘빅뱅’이라는 대폭발로 우주는 지금까지 팽창만을 거듭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팽창할지 방향을 바꿔 수축을 할지는 알 수 없다. 여러 정황들로 봐서 인도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우주의 모습처럼 팽창과 수축을 주기적으로 할 거라 생각했지만 현재는 팽창 우주론이 대세란다. 영원히 팽창하는 우주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진동 우주든 그 상황을 구구절절이 이야기해도 난 이런 기억만이 떠오를 뿐이다.
아주 어린 시절, 처음으로 엄마랑 떨어져 깊은 산속 동네에 있는 고모집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다. 자다가 일어나 사촌언니가 아무리 달래도 그치지 않는 폭풍 울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마치 우리 집과 고모집이 다른 세계 같아 다시는 엄마를 보지 못할 것 같은 슬픔과 공포감이 산더미처럼 밀려왔다. 얼마나 아득하게 느껴졌으면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도 캄캄한 우주 어딘가에 내 울음소리만 메아리치는 것 같았던 그 밤의 막막함이 지금도 선명할까.
우주의 탄생과 소멸, 사람이 신의 꿈이 아니라 신이 사람이 꾸는 꿈의 결과 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우주 어딘가에 내 울음소리만 가득했던 꼭 그 밤의 느낌이다. 왠지 나와 차원이 다를 것 같은 칼 세이건의 스스로 과학과 종교를 통틀어서 가장 멋진 아이디어라는, ‘우주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우주들이 끝없이 위로 아래도 이어진다는 거다. 전자 같은 소립자도 그 나름의 닫힌 우주이고 지금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이 우주도 한 단계 위의 우주에서 보면 하나의 소립자에 불과하다는... 이러한 계층 구조가 무한히 계속되고. 자기도 여기까지 생각하니 사고의 흐름에 절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둥 너스레를 떤다.
자, 이제 영원의 벼랑 끝에 서서 정들었던 이 우주와 헤어져, 저 우주로 뛰어들 채비를 해 보자.(p533)
한 발짝만 내딛으면 곧장 어둠 속으로 떨어질 테고 그러면 모든 일이 끝나는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지나가 버리겠지요. “사자왕 스코르 빤, 무섭지 않니?” “아니.... 형, 사실은 무서워. 하지만 해낼 수 있어. 지금, 바로 지금 할 테야. 그러고 나면 다시는 겁나지 않겠지. 다시는 겁나지....”
“아아, 낭길리마! 형, 보여! 낭길리마의 햇살이 보여!”
이 장의 마지막 문장과 동화 <사자왕 형제의 모험>의 마지막 장면, 과학적 상상이 문학으로 탄생한다면 충분히 저렇지 않았을까! 현실이 무겁고 힘들었던 형제는 ‘낭기열라’라는 세계로 가 용감하게 악과 맞섰고 이젠 다시 ‘낭길리마’로 건너가려는 참이다.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은 간절함과 용기였다. 칼 세이건의 우주로 향한 마음, 더 나아가 다른 우주에 대한 열망도 이에 못지않다. 영원의 벼랑 끝은 끝이 아니라 다른 우주의 시작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