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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읽기

경계가 무너지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by 여름지이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2024 개봉, 제80회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이 영화의 전반은 그동안 보아온 일본 문학이나 영화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순하고 단정하고 오래 들여다 보기. 자연과 사람들.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영상은 군더더기 없이 사실적이고 고요하게 흐른다.

숲의 사람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나무를 잘라 장작을 한참 패고, 맑은 웅덩이 물을 떠서 약숫물 담는 하얀 들통에 연신 붓는다. 자연인 같은 그에게 좀 바빠 보이는 다른 남자가 나타나 함께 그 물통들을 차에 옮기기 시작하는데, 두 사람은 묵언수행이라도 하듯 말없이 물통을 들고 걷고, 카메라는 또 길게 두 사람을 비춘다. 침묵을 깨는 것은 갑자기 놀란 표정의 두 사람을 클로즈업한 장면이다. 무얼 발견했나 보다! 특이하게도 카메라는 발견한 걸 보여주지 않고 놀란 사람 얼굴에 계속 초점이 맞추어 있다. 비로소 나타난 것은 겨울에 파릇파릇 살아있는 땅에 딱 붙은 식물. 굉장한 약초는 아니었고 땅와사비라 했다. 예부터 우동에 넣어 먹는 식재료라는데, 이제는 잘 보이지 않던 것이 뜻밖에 지역에서 우동 가게를 하는 사람 앞에 나타난 것이다. 뒤에 바삐 나타난 분이 그 사람이었고 두 사람이 떠가는 물은 우동가게에서 쓰일 물이었다. 도쿄에서 하던 가게를 이곳 물맛에 반해 옮겨왔다는 걸 보면, 실제 빵을 위해 좋은 물과 천연균을 찾는 내용의 책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저자의 삶이 괜한 게 아니었다.


우동가게 일을 돕지만 우동값을 정확히 내는 숲사람 이름은 '타쿠미', 그는 마을의 심부름센터를 자처하며 그곳 실정에 밝아 보인다. 패전 후 정책적으로 이주한 개척민 3세대로 무슨 일인지 아내는 사진에만 있고 현실은 어린 딸 하나랑 살고있다. 여기서 '하나'는 한 명이라는 뜻도 되고, 딸의 이름이 일본말 '하나' 이기도 하다. 타쿠미는 보통의 딸 가진 아빠처럼, 특히 혼자 키우는 아빠로서 딸에 대한 행동과 마음이 자상하거나 애틋해 보이지 않는다. 자주 학교에 데리러 가는 걸 잊어버리고 집안에서도 자기 일에 몰두한다. 하나 역시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게 친구들과 놀기보다 아빠를 기다리는 것보다 혼자 들판으로 숲으로 다니는 게 좋아 보였다. 영화의 첫 장면은 나무가 울창한 겨울 숲에서 고개를 쳐들면 일렁이는 무늬 같은 나무와 하늘의 모습이 걷는 이의 시선으로 꽤 오랫동안 펼쳐지는데, 곧 숲에 혼자 있는 하나의 시선임을 알게 된다. 부녀는 역시 숲에서 다정하다. 업고 업힌 두 사람은 나무와 동물 이야기에서 다정한 부녀 사이가 되며 숲은 그들의 안식처 같다.


자연과 상생하는 생태적인 삶이 엿보이고 마을 공동체가 살아 있는 이곳에, 느닷없이 글램핑장이 들어설 거라고 도시 업체가 설명회를 여는 일이 일어났다. 드디어 사건이? 그럼에도 제목에 들어있는 '악'은 도대체 어디서 연결될 것인지 갈수록 의문스러웠다. 이 마을에는 개발이라는 게 악인가. 개발이 일상이 된 한국사람에게 악은 보이지 않았고 영상은 특별한 점이 있었으나 흘러가는 이야기는 제목만큼 심오하지 않았다. 심지어 개발업체 직원이 오히려 마을사람들 삶에 감화되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귀촌을 하고 싶어 하는 뉘앙스가 풍기는 지점까지 왔을 때는 우리와 다른 일본의 정서를 또 한 번 느끼며 결말을 예측했다. 이 직원의 이름은 '타카하시' 다. 생뚱맞게도 레저시설 건설이 정부지원금을 따내기 위한 연예기획사 사업이었고, 타카하시는 연예인 매니저를 하다가 일반 직원이 되어 이번 사업에 현장 일 즉 주민들과 접촉하는 실무를 맡은 사람이었으나 어쩐지 삶에 변화가 올 것만 같다.


진짜 사건, 기이한 결말로 다가가는 일은 후반부가 또 반을 넘길 무렵 일어난다. 늦는 아빠를 기다리지 않고 학교에서 혼자 집으로 돌아가던 타쿠미의 딸 하나가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고요하던 영화와 산촌 마을은 과묵한 겨울산에 아이를 찾는 바쁜 발걸음들, 확성기 소리까지 더해져 긴장감이 고조된다. 밤이 되어도 수색작업은 이어지나 아이는 나타나지 않고.. 검푸른빛의 새벽이 오고야 말았다. 전날 타카하시는 개발 사업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타쿠미를 회유하러 왔었는데, 뜻밖의 일로 타쿠미와 한조가 되어 하나를 찾으러 다니던 터였다. 밤을 걸은 지친 두 사람이 파르스름한 새벽빛에서 마침내 발견한 것은 하나의 뒷모습과 마주하고 있는 사슴 두 마리. 어미 사슴, 새끼 사슴으로 보인다. 새끼 사슴은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다.

전날 낮에 타카하시는 타쿠미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글램핑장을 계획하는 그곳은 사슴들이 오고 가는 곳이라고. 원래 야생의 사슴들은 동물원 사슴에게 보이는 공격성이 없으나 총에 빗맞았을때, 그러니까 총을 맞았으나 죽지 않았을 때 주변에 사람이 보이면 공격한다고. 어쨌든 시설이 들어서면 사슴들은 자연히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냐는 타카하시와 함께 온 다른 직원 말에 타쿠미는 '어디로 가라고?'라는 짧은 말로 언짢은 기색을 비추었다.

그러면, 찾아 헤매던 하나를 발견한 두 어른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사람이 쏜 총에 맞아 공격성이 살아났을 사슴 두 마리와 마주한 하나를 발견하고. 자연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사람의 일에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용납할 수 없는 기이한 장면을 연출한 영화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지금까지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독자와 영화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에게 영화를 직접 보기를 권한다. 대부분 멘붕이 왔다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 역시 혼란에 빠졌었는데, 문득 권정생 작가의 <용구 삼촌>의 한 장면이 떠오르자 막혔던 무언가가 살짝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 동화에도 화자의 삼촌, 용구가 실종된다. 더없이 순하고 착한 사람이지만 서른 살이 넘도록 다섯 살배기 보다 더 어린애 같다는 말을 듣는 바보였다. 겨우 밥을 먹고 뒷간 가 똥 누고 고양이처럼 입언저리밖에 씻을 줄 모르는 용구 삼촌, 자주 야단을 맞으며 자라서인지 말도 거의 없다. 이런 용구 삼촌이 소 누렁이가 삼촌을 데리고 간다고 할 수 있는 소먹이를 하러 갔다가 그날 해질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온 가족과 이웃들은 어두운 산을 찾아 헤맸고, 발견된 용구 삼촌의 모습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아아! 삼촌은 죽지 않았습니다. 다복솔 나무 밑에 웅크리고 고이 잠든 용구 삼촌 가슴에 회갈색 산토끼 한 마리가 삼촌처럼 쪼그리고 함께 잠들어 있었습니다. 귀머거리에 가깝도록 가는귀가 먹은 삼촌이 큰 소리로 불렀는데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건 이상하지도 않았습니다. (...)

"용구 삼촌!"

나는 더 참을 수 없어 삼촌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곤히 잠들었던 멍청한 회갈색 산토끼가 놀라 눈을 뜨더니, 축구공처럼 굴러가듯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용구 삼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명확하지 않은 동화의 마지막은 어쩐지 애잔하다기보다는 숭고하다. 죽고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용구가 그곳에 있어 토끼도 있고 산이 있고 세상이 있는 느낌이랄까. 모습은 사람임에도 아직 사람이 안된 자연과 같은 용구의 모습은 우리의 오래된 미래, 갈수록 복원이 필요한 순수성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영화로 돌아가, 하나와 사슴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슴의 몸에, 죽은 하나의 코에서 똑같은 붉은 피가 흘렀다. 둘은 적이 아니라 상처받은 순수의 자연이다. 서로의 영역을 지키는 균형이 깨질 때 어미 사슴의 공격성은 누구에게나 살아난다. 우리는 원래 자연이었으니까. 그러면 마지막 장면에서 균형을 깨는 자는 누구였을까. 악이 아닌 악은 왜 탄생하였나.



사람과 자연,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무는 소름 돋는 영화였다. 그리고 돌아가 다시 보니 곳곳에 은유가 가득한 시를 닮은 영화였다. 겨울과 겨울산을 듬뿍 보여주는.

타쿠미와 하나는 숲으로 돌아갔다.









*용구삼촌/ 권정생 글, 허구 그림/ 도서출판산하,2009

*이미지는 영화 화면을 폰으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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