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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Jun 01. 2020

느리고 재미있는 책 생활

** 나는 진심으로 아일랜드 서점을 사랑한다. 나는 신을 믿지 않고, 종교도 없다. 하지만 내게 이 서점은 이승에서 교회에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곳은 신성한 곳이다.  ** 소설 <섬에 있는 서점> 중


덕소에서 첫 번째 이웃이 되어 준 B언니가 전도를 하려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를 만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영적으로 풍요로워졌는지, 신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영화로운 일인지, 진심을 담아 열성적으로 얘기했다. 백퍼 공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난 희망이 차오르는 그 언니 얼굴을 보며 이런 말을 하고 말았다.

언니, 저도 똑같은 경험을 했어요!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났고 책방에만 들어서면 영혼이 부풀어 오르고 숙연해지고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해요. 전 순례자의 마음으로 작은 책방들을 다니고, 세계 어느 곳이든 책방이 있는 곳은 달려가고 싶어요!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역시 고개를 끄덕여야 했던 B언니 앞에서 신을 접견한 듯 내 얼굴은 환희에 차있었을 거라고... 당시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지금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미 책이라는 종교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으니 어느 누구의 말도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진 못했던 것이다.


종교생활을 한다고 모든 게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내 책 생활도 완벽하진 않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흔한 속독, 문자 중독도 없어 읽은 권수를 따지면 평범한 독서량이다. 책벌레도 아니고... 편독 성향도 있어 지성보다는 감성만 더 도드라지고 있다. 대신 느리게 반복해 읽다 보니 꽂히는 책엔 무척 고무되어 책 내용처럼 생각하고 행동(소시민적으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까운 사람들은 이런 나를 이상주의자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기도 하던데... 그 말이 싫진 않다.

현실과 이상은 반드시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현실의 존재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끊임없이 이상화되고 반대로 이상은 끊임없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출처가 어딘지도 모르는 이 문구를 한 번씩 들추어 보고는 감복(마음속으로 감동하여 탄복(마음속 깊이 감탄함))을 한다.


B언니에게 했던 말은 정말 진심이다. 전도를 막으려고 과장한 말이 아니고 정말 그러하여 책과 글쓰기, 책방 순례가 없는 삶을 이젠 상상할 수가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세상을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는 결혼, 불과 얼마 전까지 선택이 아닌 통과의례였던 육아 기간이 책이 종교화된 지점이었던 것 같다. 어려운 지점을 통과하기 위해선 지식과 지혜가 필요했고 외부의 도움보다는 스스로 터득하며 내면의 힘을 키우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읽어줄 책을 고르기 위해 들락거린 어린이 서점에서 시작된 독서모임은 무언가에 꽁꽁 싸매져 있던 나 자신을 거울처럼 비춰 주었고 풀 수 있는 실마리까지 곁눈질해주었다. 어두운 터널 같았던 그 구간을 지나 온몸으로 맞은 햇살은 그림자 같았던 아이를, 세상을, 조금 선명히 보여 주었다. 가피를 입고 구원받은 느낌이었으니 그 이후는 더 말해서 무엇하랴.


어린 시절로 올라가도 역시 책벌레는 아니었으나 책에 대한 막연한 판타지가 있었던 것 같다. 책이 흔하지 않은 시절이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도서'관'이 아니라 '실'에서 창문밖에 있는 집체만 한 플라타너스를 보며 꽤 두꺼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완역본?을 읽고 있는 모습을 연출한 걸 보면. 초등생이 그 오리무중의 이야기를 이해했을 리 만무하고 그냥 그런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엄마가 골라주는 옷을 입기보다 스스로 고르는 아이는 옷 입은 자기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아이라던데, 도서실에서 책 보는 내 모습을 상상했던 것일까?


더 올라가면 헉헉!.. 글자를 깨치고 처음으로 교과서가 아닌 스스로 읽은 이야기책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글을 쓰다 보니 지금 누리고 있는 책 읽기와 글쓰기의 원천이 되어준 책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서울 간 오빠가 사다준 <중국 아동문학전집/ 성림 문화사/ 선 용 편자> 1975년판 10권이다.

그중 1권만 이렇게 내 손에 아직 남아있다.

애써 간직하려 노력하진 않았지만(친정집에 굴러다니는 걸 마음 내어 들고 온 것 밖에는) 어쩌다 보니 보관이 되었다. 첫 번째 이야기 <사슴과 구슬>을 읽었을 때 환상적인 느낌을 주체하지 못해 무려 12살이나 많은 큰오빠를 잡고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들려주었을까. 진짜 그런 부분이 있어?? 어린 동생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척하는 오빠에게 구슬 삼키는 부분을 찾아주며 의기양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처음으로 앉아서 하는 여행을 시켜준 책과 나의 '썸'이 4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아직 내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려나.


요즘은 2년 전까지 부산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글쓰기 수업을 했던 어린이 책방에 대한 향수로 동네 작은 책방, 전문 책방(과학, 사진, 시, 그림책 등), 헌책방을 찾으려 애쓴다.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분들의 신념과 노력, 노고, 그런 책방들이 왜 가까운 곳에서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기에 책방 순례를 멈출 수가 없다. 작년에 헌책방 주인 윤성근이라는 사람이 쓴 <동네 헌책방에서 이반 일리치를 읽다>를 보고 그가 운영하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곳엘 다녀왔다. 동화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에 나오는 헌책방 주인'그러게 언니'는 스웨덴 동화작가 린드그렌의 작품 37권을, 인천 배다리에서 헌책방 '한미 서점'을 하는 브런치 작가 시연님은 <키다리 아저씨> 모든 판형을 모으고 있다 한다. 헌책방 주인들의 특징인가? 윤성근 작가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좋아해 국내외 모든 판형을 수집하고 있는 중이고 그래서 책방 이름도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과연 책 덕후들이다.


그곳에서 나도 귀한 책 2권을 얻었다.

 영국의 삽화가, 화가, 디자이너(웨지우드 도자기 디자인)로 유명한 렉스 휘슬러(1905~ 1944)의 그림이 들어있는 안데르센 동화집이다. 우리에겐 생소한 화가지만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1944년 노르망디 작전 중 사망하여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 묘비가 세워진 일화로도 유명하다. 내 손에 들어온 책은 1953년 판으로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안데르센 이야기들이 멋진 삽화와 함께 가득하다. 영문이라 내용을 섬세하게 알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빨간 무늬 표지에 반했고 특별한 화가의 그림집으로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거금?을 들여 사고 말았다.


두 번째 책은 에니드 블라이튼(e nid blyton, 1897~1968)이라는 영국 최고의 동화작가 쓰고 그린 <TALES of TOYLAND>, 1963년 판이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들추어보니 영화 '토이스토리'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나 싶을 정도로 설정이나 분위기가 비슷하다. 역시 자세히 읽어봐야 알겠지만 아기자기한 그림과 묘사보다 대화문이 많은 글 구성이 옛이야기처럼 술술 읽히게 생겼다. 문학적 가치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도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가 번역되어 있을 정도로 전 세계 많은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작가임엔 틀림없고 영국에서는 거의 국민작가 수준이라 그녀의 삶이 'enid'라는 bbc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정(情) 품 중 하나인 책을 소개하려다 어쩌다 보니 평범한 리더의 책 역사가 방만하게 나오고 말았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책에 대한 기억이 어쩌면 조금 과장되게 이렇게 도드라진 건, 아마 어려운 시기에 책방을 만나 책과 글쓰기를 통해 삶을 가꿀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란 인간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체면을 스스로 걸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마법을 걸어 준 20년 지기 어린이 전문서점 '책과 아이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그곳이 오래도록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반짝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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