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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Aug 23. 2020

부암동 어디쯤에


문득 눈에 들어온 이 통을 자세히 보니 찻잎을 따는 여인과 일본? 의 사계가 그려져 있다. 색깔이 알록달록해 마루 한쪽에 장식품같이 두고는 거의 1년 넘게 방치했는데, 새로운 발견이다. 그러고 보니 찻잎이 담겨 있는 걸 알면서도 차 한잔 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한 번밖에 보지 못한 진이 언니가 자신을 꼭 기억하라고 준건 분명 아닌데, 눈에 들어오니 생각이 난다. 연인들이 헤어질 때 서로 주고받은 물건을 돌려주는 건  맞는 것 같다.


재작년 겨울, 낯선 곳에 적응할 즈음 어디라도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동네를 나가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건 자유롭지만 외로운 거다. 멀리 있는 지인들한테 외로움으로 겉멋을 부리듯 넘치는 자유로움에 대해  자랑도 푸념도 아닌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는 했지만 마음은 어디 사람 없나 기웃거리고 있었다.

동화 쓰기 강좌에 등록한 것도 어쩌면 그 마음이 시켰는지도 모르지만 또 누군가한테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꼭 동화를 쓰고 싶다기보다는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서 한 번 들으나 보려고...


낮에 열리는 수업이다 보니 여성들이 대부분이었고 동화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나 싶을 정도로 교실이 꽉 찼다. 다들 의욕이 넘쳤다. 매주 과제를 하다 보면 마지막 주에는 동화 한 편이 완성되는 과정이었다. 한 번 들으나 보려고 간 나는 정말 듣기만  했고.... 숙제를 안 했다는 건 주제넘은 소리고, 못했다. 다만 이끌어주던 진짜 동화작가한테 생생한 작가의 세계를 듣는 게 더 재밌고 흥미로웠다. 과학을 전공했지만 과학자의 삶에 관심이 많고 글쓰기를 배우러 가서는 또 작가한테 곶혀 버린다.  결론적으로 난 공부보다는 사람한테 관심이 많은 인간임에 틀림없다. 이런 내가 작가님만 알고 그 많은 수강생들 중 단 한 명 하고도 말을 섞지 않았다면, 이 넓은 우주에 우리만 있다면 공간 낭비라는 칼 세이건 말처럼, 시간 낭비가 될 뻔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설 연휴 후유증으로 갈까 말까 고민을 했던 마지막 수업 날, 피로감을 견뎌가며 겨우 듣고는 딱히 인사할 사람도 없어 바쁜 척 엘리베이터 앞으로 바삐 걸어갔다. 먼저 온 낯선 얼굴과 눈이 마주쳤고 그쪽에서 미소를 짓길래 겸연쩍어 살짝 눈인사를 했다. 같은 방에 있었던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얼굴이다. 뭐라도 말을 해야 될 것 같은 지점에 엘리베이터 안에 빨리 듯 함께 들어갔다.

괜찮았죠?...

네, 나름 좋았어요...








땡! 스르륵

같이 밥 먹을까요?

건물을 빠져나올 때쯤 우린 오랜 친구인 듯 서로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고 근처 밥집에서 돌솥비빔밥을 비벼 먹으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밥을 먹고는 둘 다 별일이 없는지 근처 경희궁 쪽으로 걷고 있었다. 봄기운을 품은 따뜻한 햇살을 등지고 산책로를 걸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니 좋았다. 도심에 있는 궁궐 길이 신기해 수업 들으러 올 때마다 혼자 걸었는데 마지막 날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걷게 되다니.  나보다 두 살 많은 진이 언니는 아마추어 애니메이션 감독이었고 관련 실용서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쓰고 싶은데 스토리텔링이 부족해 이 강의를 들으러 왔다고 했다.


경희궁을 통과하여 위쪽으로 가다보면 너른 공터가 나오고 오른쪽 옆으로 나무 울타리가 있다. 거기에 한 사람 통과할 정도의 개구멍 비슷한 게 또 있다. 구멍을 통과해 작은 골짜기를 내려와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면, 사계절 출판사에서 하는 복합 문화공간인 '에무' 뒷문을 통과해 카페로 들어가게 된다. 두리번거리며 따라오던 언니는 서울 토박이지만 이 길은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원래 지방 것들이 서울 곳곳을 헤집고 다닌다고 했더니 깔깔깔 웃었다.


빨간 차통은 그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진이 언니가 불쑥 가방에서 꺼내 준 것이다. 왜 그걸 가방에 넣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본 나한테 일본 여행 가서 사 온 거라면서 선물주 듯 주었다. 그날 분위기는 그런 것을 충분히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였다. 차통과 차를 사이에 두고  함께 들은 강의 이야기, 책 이야기, 애니메이션 이야기 등 정말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얘기를 많이도 했다.


오후 시간이 마냥 한가한 줄 알았더니, 갑자기 개 산책시킬 시간이라며 언니가 서두르는 태세다. 근처 부암동이 집이고  남편이 직장 다니며 산에서 농장을 하는데 그곳에 있는 개를 자기가 매일 산책을 시켜야 된다고 한다. 부암동, 산, 농장, 개!? 부암동은 서울에서 개발이 덜 된 옛 정취가 살아있는 동네라고 알고 있는데, 그래서 가보고 싶었는데, 산에 농장까지 있다고? 언니, 나도 개 산책시키는데 따라가면 안 돼요?라는 말이 물색없이 나와 버렸다. 잠깐 당황한 눈빛을 보이던 진이 언니는 흔쾌히 “그래! 그럼 같이 가요. 근데 자기 보면 놀랄걸. 뭐, 서울에 이런 데가 있나 하고.” 더 호기심이 당기고 궁금해졌다. 갑자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될 것만 같았다. 앨리스는 우연히 굴에 빠졌지만 난 다른 세상을 기대하고 미리 앨리스 채비를 하고 있었다.


 택시는 금방 도심을 빠져나가 오르막을 올라 낮은 산 중턱쯤 되는 곳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사람이 바글바글 하던 광화문에서 호젓한 산골 마을로 순간이동 한 기분이랄까. 늦은 오후 회색빛 마른 가지로 첩첩이 둘러싸인 황량한 겨울산은 그런 기분을 더 부채질 했다. 사람은 오직 우리 둘 뿐. 언니가 여기서 내려가면 농장이 있다 했다. 이런 곳에 농장이???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정말로 찢어진 작은 비닐하우스 세 동이 나오고 그 옆에 덩치 큰 백구(밖에서 키워 회색빛으로 변한) 두 마리가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웅웅거렸다. 순간 영화 ‘버닝’의 음산한 시골 분위기가 마구 떠올라 ‘오늘 이거 괜한 짓을 했나’하는 불안감이 잠깐 스멀했다.


비닐하우스 가까이 가보니 거대한 포도나무가 앙상한 자태로 몇 그루 있었고 정말 여기저기 농사를 지은 흔적이 보였다. 서울 도심 가까운 곳에 누군가는 포도 농사를 짓고 있었다니. 제법 수확을 할 수 있는 규모인 것 같아 판로는 어떻게 되냐 했더니 지인들에게 나눠 주기도 팔기도 한다고. 진이 언니는 남편의 이런 삶을 완전히 지지하지 않는 듯했지만 개 돌보는 일은 자기 몫이 되어 어쩔 수 없다 했다. 안도감에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숲이 제법 울창하다. 싸리비 같은 마른 가지들이지만 내 눈에는 이름표가 보였다. 곧 물이 오르고 새잎이 나면 저기 내려가는 길은 개나리가 지천일 거고(벌써 버들개지는 수줍게 피어 있었다!,) 뒤편 키 큰 상수리나무들은 숲을 더욱 울창하게 만들겠지. 근처 소나무, 오리나무도 합세하겠구나. 멧돼지도 나타난다고? 당연한 이치 아닌가! 숲은 모든 생명들의 안식처니. 개나리 필 때 또 오고 싶다 했더니 언니가 언제든지 오라 한다.  


말이 필요 없는 기분이 되어 산을 내려오는데 맞은편에서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불쑥 나타났다. 진짜 ‘불쑥’이었다. 그 날 들어갔던 굴, 숲의 세계가 끝나는 지점이었다.


차통은 언제라도 진이 언니를 불러 낼 것이다. 이웃도 아니고 아무런 연고가 없어 그 날 하루 쌓은 우정으로는 왠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관계지만, 실제로 계절이 여러 번 바뀌어도 진이 언니를 만나진 못했지만 꼭 만나야만 되는 관계만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야기를 만들어준 진이 언니는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처서인 오늘, 부암동  어디쯤에는 포도가 까맣게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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