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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an 10. 2017

내 부고도 갑자기 날아간다.

가재는 게편이다.


갑자기 날아오는 부고에 적잖이 당황한 적이 여러번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지인의 부고를 갑자기 받으면...

나의 부고 역시 갑자기 날아갈 것이다. 나를 알던 지인들도 갑작스런 내 부고에 당황하겠지만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은 바로 나다. 이런 당황스러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정돈 해야한다. 갑작스런 내 부고에 내가 당황하지 않도록...

다시 읽을 것 같아 책장을 꽉 채운 책들은 장서가 빈약한 도서관에 기증하고, 내년에도 입을 것 같아 옷장을 꽉 채운 옷들은 수거함에 처넣고, 추억을 간직한 온갖 잡동사니들은 추억과 함께 쓰레기통에 넣어야겠다. 집뿐 아니라 학교 내 연구실도 책, 노트, 보고서와 잡동사니로 가득차 있다. 심지어 대학시절 필기한 노트와 일기장까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젊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다시 반추할 시간이 없듯이 지난 추억들을 되새김질할 시간도 이제는 없다. 이제는 빨리 버려야 한다. 책과 옷과 추억을...

사촌형이 자신의 아버지(내겐 고모부) 임종을 맞은 기억을 들려준 적이 있다. 고모부님이 사용하던 책상 서랍에 바인더 노트가 하나 나왔다. 바인더 첫 장에는 본인의 사진이 몇 장 있었다. 그 중에 한장을 영정사진으로 사용했단다. 첫 장을 넘기자 연락처가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단다. 부고를 알릴 리스트였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아끼던 물건들과 그 물건을 받을 사람들의 리스트가 빼곡했단다. 그 바인더는 오래전부터 정리해 온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고모부는 말년에 파킨슨병을 몇년이나 앓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사촌형은 아버지의 용의주도함에 감탄했다.

자신의 영정사진을 골라놓고 자신의 부고를 알릴 리스트를 정리하고 아끼던 물건의 처리까지 정리하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환갑이 제 2의 인생의 시작이라고 말하지만 자신의 죽을 준비도 시작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영정사진도 가장 멋진 것으로 준비하고 내 부고를 알릴 사람들을 빠트리지 않고 한명씩 만나야겠다. 꼭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버킷리스트도 정리하고 하나씩 실행을 준비하는 시작말이다.

13년을 산 집을 수리할 돈을 내든지 결혼을 끝내는 졸혼을 하든지 양자택일하라는 아내의 최후통첩을 받았다. 틈만 나면 당신은 배낭 메고 밖으로 돌아 다니지만 자기는 더 이상 집을 이렇게 하고는 못산다고... 일견 수긍이 가기는 한다. 딸하고 셋이 있으면 가재는 게편이라 나만 궁지에 몰린다. 그러던 어느날 오랫만에 아들도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아들은 내편을 든다. 집수리하는데 무슨 그렇게 큰 돈을 쓰냐고... 자기도 돈 벌어보니 돈 버는게 쉽지 않다며...

역시 가재는 게편이다.

6개월을 끌다 내가 항복했다. 그러나 조건을 달았다. 6개월이든 일년이든 일단 우리의 추억을 담은 이 집안의 모든 잡동사니를 꺼내보고 적절하게 처분하면 수리비용 내겠다고...

당신 옷, 책, 도자기들 처분이 쉽지 않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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