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야만성을 두드리다.
아르헨티나의 브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온전한 2일이 주어졌다. 당연히 첫날 저녁은 탱고에 할애 했고 두번째 날은 Fuerza Bruta 공연을 선택했다. 아르헨티나가 자랑할 만한 공연이었다. 그렇게 밖에는 표현이 어렵다.
영어로는 brute force이고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원시의 힘 또는 야만의 힘 정도가 가능할 듯하다. 객석이 따로 없고 유명한 밴드의 실황공연 보듯이 서서 관람해야 한다.
그림을 구상화와 비구상화(추상화)로 나눈다. 구상화 전시회를 보고나면 자신이 무엇을 보았고 느낌이 어땠으며 심지어 평가도 할 수 있다. 보는 편이 좋을지 안봐도 무방할지 등등... 그러나 추상화를 잔뜩 보고나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설명하라면 할 수 있겠는가?
3차원의 무대와 음악과 춤을 잔뜩 보고 경험했는데, 솔직히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한다는 것이 너무 어렵다. 15명의 배우와 무대장치와 음악을 위한 많은 스태프, 일종의 종합예술공연이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난타가 세계공연을 다니듯이 이 공연도 매년 세계 각국을 돌아 다닌다.
큰 런닝머신 위를 남자가 걷는다. 점점 빨리 걷다가 나중에 뛰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뛰는 배우 등뒤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나고 쓰러진다. (인생을 보는 듯...)
큰 런닝머신 위를 남자가 걷는다. 앞에서 계속 사람들이 나타난다. 사람 사이를 걷느라 힘들어 하지만 불평없이 계속 걷는다. (사람이 인생의 장애물인 듯...)
식탁과 의자가 러닝 머신 위에 놓여 있다.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 조금 뒤 머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남자는 식탁과 의자가 러닝머신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집어서 앞으로 옮기려 애쓴다. 시간 앞에 무력한 것들, 아니면 영원할 수 없는 것들을 계속 붙잡고 가려는 불쌍한 인생이 보인다.
바닥이 투명한 비닐로 만들어진 거대한 풀장이 천정에 매달려 있다. 물과 여자의 몸동작이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만든다. 양수 속에 갖힌 태아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좁은 풀장 공간 안에서 네 명의 여자들이 어울려 흥겨운 댄스를 한다. 투명한 비닐 밑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쳐들고 배우들의 가랭이 사이 팬티에만 자꾸 눈길을 준다.
다섯명 정도의 배우가 음악에 맞춰 군무를 한다. 거의 막춤에 가깝지만 다섯의 몸동작이 일치하는 것을 보면 막춤은 아니다. 강한 야만성이 느껴지는 음악과 격렬한 춤은 마오리족과 같은 원시부족들이 싸우러 나가기 전에 추는 춤과 음악 같다. 계속되는 북소리가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고 강렬한 춤동작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따라하게 만든다.
계속 스프레이 되는 물이 중앙의 관중들을 적신다.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흰 종이들이 날리며 얼굴을 때린다. 레이저쇼에 가까운 조명들이 현란한 색과 무늬를 천장에 수놓는다.
무엇을 보았는지 아니 경험했는지를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나 70분 정도의 공연을 함께 하고 나오는 얼굴들이 매우 만족스럽다. 응어리져 걸려 있던 가래를 밷은 듯, 피부 밑에 박혀있던 기름주머니를 짜낸 듯한 기분이다. 카타르시스를 맛 보았다. 270페소에 70분 동안 내 안의 야만성을 두드린 경험이었다. Fuerza Bruta 의 경험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