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딱 10초뿐이다.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일요일 아침 새벽 4:20에 알람 소리에 깼다. 인천공항에서 7:45에 동경 나리타공항으로 출발하는 아들(자동차 디자이너 4년 차, 30살)을 공항에 태워주기 위해서다. 아들은 올해 남은 월차를 연말에 다 몰아서 신년까지 쉰다 했다. 월차가 남았다고 그렇게 다 쓸 수 있는 회사는 좋은 회사 거나 주인이 없는 회사다. 일본 혼다자동차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선배와 동기를 만나러 간단다. 아직 밤에서 깨어나지 않은 공항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시속 150 키로를 넘어 달리자 아들이 말린다. “왜 이렇게 밟어? 시간 충분해.” “ 이 차(폭스바겐 시로코)만 타면 밟게 되네. 너무 잘 나가서...” 운전하는 사람이 느끼는 속도감과 동승한 사람이 느끼는 속도감에 차이가 크다. 저가항공사들의 비행기 시간이 이렇게 일찍인 것은 아마도 인천공항 사용료를 절약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항공편을 이용하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공항 주변 운서동에 24시간 찜질방이 몇 군데 있다. 출발 전날 이용하라고... 아들을 내려주며 한마디 했다. “내 선물은 사 올 것 없다. 잘 놀다 와.” 아빠 선물은 일도 생각 안 하고 있을 아들은 “알았어.”하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눈앞에서 사라진다.
아직 해 뜨려면 멀었다. 이제 겨우 5:30이다. 동남아에서 돌아오는 항공기들이 고속도로 위를 낮게 지나가며 착륙한다. 어두운 하늘 사이로 비행기 꼬리 날개의 항공사 로고가 눈에 들어온다. 비행기를 보면 괜히 마음이 설렌다. 4차선 공항 고속도로가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 달릴 일만 남았다. 더구나 혼자이니 실컷 달려도 된다. 카메라에 찍히지만 않으면... 1차선에서 어정 하게 달리는 차들을 추월하기 위해, 1차선에서 4차선까지 단숨에 차선 변경을 해가며 조금이라도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차들을 추월한다. 이즈음 차들의 성능이 좋아지고 1차선이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많은 자동차들이 꾸역꾸역 1차선으로 들어선다. 그러다 보니 1,2 차선은 붐비고 3,4 차선은 한가한다. 이제는 3,4 차선이 추월선이다. 우측 차선 추월은 원래 위험한 추월이다. 교통사고 처리 특례법에서도 신호위반과 동급으로 취급하여 처리 특례 적용이 안된다. 그러나 이즈음 1차선에 들어선 차가 워낙 많다 보니 우측 차선 추월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스위스에선 우측 차선 추월을 불법에서 제외시켰단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집에 도착하니 하늘이 훤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일찍 일어난 적이 최근에 없는 것 같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로 목욕탕으로 갔다. 일요일 아침이라 목욕탕에 사람들이 제법 붐빈다. 그러나 시간이 아직 일러 그렇게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대충 샤워를 하고 뜨거운 탕에 몸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최근 읽은 책의 구절이 떠오른다. “행복이란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고 딱 10초 동안 느끼는 감정이다.” 10초 이후까지 그 행복감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에 동감한다. 행복은 잠깐이다. 결코 지속될 수 없다. 이 순간의 행복을 용케 잡아낸 사람의 통찰력에 감탄하며 나도 10초간 행복했다. 겨울이 되어 건조해진 피부를 빡빡 때수건으로 밀면서 또 다른 책의 광경이 떠오른다. '낮의 목욕탕과 술'이란 책이었는데 목욕탕에서 발가락 사이의 때까지 열심히 제거하는 사람을 묘사한 광경이... 나도 모르게 때수건을 내 발가락 사이로 밀어 넣었다.
수도꼭지 앞에서 앉아서 몸을 씻고 있는데 어르신 한 분이 한 손에는 목욕도구들을 들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내 옆자리로 온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등산용 지팡이를 쭈그려 앉는 의자의 가운데 구멍에 꽂고 이리저리 밀면서 의자의 위치를 조정한 후 조심스럽게 앉는다. 근육이 없어 처진 몸이지만 하얗고 깨끗하다. 이런 지팡이를 탕안에서 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수채 구멍으로 흘러 사라지는 몸의 때처럼 머릿속의 온갖 상념과 불안도 씻겨 나간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목욕탕에 왔는지 후회가 밀려온다. 목욕탕은 정말 좋은 공간이다. 새롭게 탄생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