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을 끝내며
성적 이의신청을 처리함으로 해서 학기가 끝났다.
2018년도 오늘 끝난다.
20대에는 시간이 시속 20킬로로 가고 40대에는 40킬로라더니 60대에는 시속 60킬로가 아니고 측정불가인 것 같다. 2018년을 회상해보니...
"교수님 이제 정년이 몇 년 남으셨나요?"
"윤 교수, 5년 미만으로 남았을 때는 학기 단위로 얘기하는 거야. 이제 7학기 남았지..."
칠팔 년 전 어느 학회에서 만난 원로교수님과의 대화다.
죽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육체적 죽음 전에 사회적 죽음이 있다.
사회적 죽음이란 사회에서 한 인간에 대한 정의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를 의미한다. 나에 대한 사회적 정의는 기계공학을 전공한 대학교수다. 정의에 따라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도 하고 논문 발표도 하고 남의 논문을 심사하고 정부 돈을 받는 남의 연구를 평가하기도 한다. 학교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대학교수의 정년은 만 65세가 되는 학기 끝이다. 소위 정년퇴임이란 사회적 죽음을 의미한다.
정년퇴임을 하면 이제 더 이상 연구를 할 필요도 없고 매년 같은 것을 가르칠 필요도 없고 남의 논문이나 연구과제 평가하는 자리에서 핏대 올리며 쓰레기라고 소리칠 이유도 없다. 나 만의 공간이던 교수 연구실을 학교에 반납하기 위해 쓸데없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많은 책들을 쓰레기통에 처넣어야 한다. 이젠 내 말을 들을 조교도 없고 야단칠 학생도 없다. 연로 교수 대접을 해주던 후배 동료 교수들은 내가 없어짐으로 원로교수가 되고 더 연로해질 것이다.
육체적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이 장례식이다. 사회적 죽음을 축복하는 의식은 정년퇴임식 또는 정년기념강연일 것이다. 같은 학기에 동시에 퇴임하는 교수들을 불러 모아 총장이나 이사장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송공패를 줄 것이고 학장이나 학과장은 이를 어찌 기념을 해줘야 하나 하고 일없는 고민을 할 것이다.
어느 의과대학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행사 자리에서 후배 교수들에게 받은 천만 원짜리 골프채가 김영란법 시행 직후 문제가 되었던 것이 기억난다.
다른 학교에서 이번 학기에 퇴임하는 선배는 같은 과 후배 교수들에게 거하게 밥을 사고 후배들은 5만 원(김영란법에 저촉될까 봐)씩 걷어 작은 기념품만을 선물했단다. 그리고 이것을 학과의 전통으로 가져가기로 했단다.
‘마지막 수업의 상상’이란 칼럼을 쓴 어느 교수는 정년퇴임 기념강연은 없다고 공지하고 마지막 수업은 하기로 한다. 혹시라도 마지막 수업을 참관하러 올 제자와 후배 교수들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처음으로 무단 결강하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증발하는 상상을 해본단다.
이제 나도 딱 10학기 남았다. 5년 내에 큰 사고(성추행이나 연구비 횡령 같은)를 치거나 죽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