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 하며 아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좋은 일은 아버지에게 별로 없다.
아들과 오랜만에 둘 만의 여행을 했다. 직장생활 5년 차인 아들이 금요일 월차 사용하고 금토일 오사카 간사이공항 왕복 편을 끊었다.
동행이 있는 여행은 떠나기가 쉽지 않다.
주체적인 인생을 사는 아들은 내게 말했었다. "직장인에게 월차나 휴가가 얼마나 소중한지 교수인 아빠는 모를 거야. 월차 하루 사용하기가 얼마나 눈치 보이고 일 년에 갈 수 있는 휴가일수가 얼마 안 되는데 그 귀중한 시간을 아버지와 둘이 보낸다. 그럴 가치가 있는지 잘 생각해 봐야 해." 그런 아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역시 쉽지 않다. 연말까지 사용해야 하는 카드사 제공 동반자 무료 항공권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아들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우리의 간사이공항에서의 추억(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둘이 인도로 가는 길에 환승을 위해 간사이공항에서 노숙을 했다)을 상기시키며 2박 3일 렌터카 여행을 제안했다. '바빠.' 한마디로 거절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재미있겠다."란 긍정적인 답이 왔다.
렌터카 예약과 숙소 예약은 아들이 하겠단다. 인터넷을 뒤지면서 애매모호한 상황 속에서 결정하는 어려움을 덜었다. 특히 일본에서의 운전이 난생처음이기에 렌터카 예약이 내겐 쉽지 않았다.
아침 8:50 출발 비행기에서 콘티넨탈 조식을 준다. 비행기 타기 전에 배고프다며 햄버거 하나를 사서 먹어치운 아들은 요구르트와 파인애플 한 조각, 오렌지주스만 먹고 머핀과 크로와상을 손대지 않는다. 회수하러 온 스튜어디스에게 손대지 않은 머핀과 크로와상을 식기째 반납해 버린다. 나 같으면 지금 먹기 싫어도 혹시 몰라 챙길 것 같은데...
'뉘 집 자식인지 있는 집 자식이네...' 하려다 아무 말 안 했다.
아들은 jalan.net 에서 Time이란 회사의 렌터카를 예약했다. 복잡한 간사이공항에서 일단 렌터카 사무실을 찾았다. 한국어로 된 설명서를 보며 보험을 결정하고 하이패스카드인 ETC 카드를 빌리고 차를 반납할 때 기름을 채울 주유소의 위치를 설명받았다. 난 그저 옆에서 보고만 있었다. 예약한 렌터카는 도요타 Vitz 였다.
간사이공항에서 다리를 건너 일본 본토로 넘어와 남쪽 지방(와카야마현)만을 돌아보는 루트를 떠나기 전에 합의했다. 복잡한 시내운전을 피하고 바다가 보이는 노천탕과 생선회가 있는 일본식 선술집 이자카야를 순례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컨셉이다. 일몰이 다섯 시 정도라 해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해야 한다. 예정했던 사키노유 온천은 생략하고 최남단 쿠시모토 시에 도착했다. 아들은 전망 좋은 와카야마-쿠시모토 리조트 호텔을 예약했다. 역시 아들은 나보단 한 급 위다. 바다가 보이는 노천탕에서 시간을 보내고 아들이 인터넷에서 리뷰를 보고 정해 놓은 이자카야로 걸어갔다. 영어 메뉴가 없는 부부가 운영하는 선술집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역시 음식을 시키는 것이다. 구글 번역기와 파파고를 이용하여 그럭저럭 의사소통이 된다. 결국 '오마카세'(주방장 오늘의 스페셜)를 시켰다.
술 한잔 하며 아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좋은 일은 아버지에게 별로 없다.
시원한 맥주 한잔을 하고 일본술 사케를 시켰다. 술이 좀 들어가자 아들은 회사생활을 얘기하기 시작한다. 벌써 만 오 년이 다되어 가는 직장인의 인생에서 회사를 빼면 별로 남는 것이 없음을 확인시켜준다. 아들의 고민도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할 것인가?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어쩌다 결혼하고 어쩌다 아버지가 되었던 젊은 시절의 나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이 하는 모든 이야기가 아버지인 나에겐 너무 재미있다. 직장상사들, 동료들, 새로 온 신입직원들, 그리고 여자 친구까지...
슈퍼마켓에서 산 원컵 사케를 호텔방에서 마시는 것으로 첫 날을 마감했다.
이튿날은 결국 너무 늦게 일어나 아침 뷔페 시간도 놓쳤다. 첵 아웃하고 편의점을 찾았다. 유명한 편의점 도시락으로 아점을 했다. 쿠시모토 시는 일종의 땅끝마을이라 태평양을 바라보는 오래된 등대가 있다. 등대 주변을 둘러보고 반도의 동쪽 해안을 따라 올라갔다. 도로 폭이 좁고 대부분의 자동차가 노란색 번호판을 달고 있는 경차다. 붐비지 않아 운전은 할 만했다. 바다를 보며 한참을 달려 신꾸 시의 에어비앤비 숙소에 비교적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정원이 있는 일본식 전통 저택에 젊은 일본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 저택의 창고를 일 년 전에 완전 개조하여 독립된 게스트하우스를 꾸미고 에어비앤비로 손님을 받는다. 일본식으로 깔끔하게 꾸며진 독채는 하루만 자고 가기에는 너무 아쉬운 공간이었다. 주인장의 추천으로 근처 카미쿠라 신사를 갔다. 뒷산 절벽에 200미터 정도의 높이에 세워진 신사는 바다와 함께 어우러진 신꾸 시의 좋은 전경을 선사했다. 12킬로 정도 떨어진 쿠모토리 온천장에서 또다시 노천탕을 하고 숙소에 주차하고 오늘도 주변 이자카야 순례......
마지막 날이다. 저녁 다섯 시까지 렌터카를 반납하고 오후 7:50분 비행기를 타야 한다. 그리고 큰길에서 좀 벗어나 일출산이라는 오다이가하라 산 정상에도 갈 마음에 왠지 마음이 아침부터 급하다. 8시에는 출발해야 한다고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들을 7시부터 깨웠다. 오늘 일정이 빠듯하다고...
짐을 싸는데 내 세면도구 뭉치 백이 안 보인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어제 온천장 휴게실에서 흘린 것 같다. 한 달치 혈압약을 비롯한 없으면 좀 불편한 것들이 잔뜩 들어 있는 작은 가방이다. 집을 떠날 때면 항상 들고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흘리다니 나답지 않다. 찾으러 간다고 꼭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 20분이면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온천장으로 향했다. 온천장 직원과 구글 번역기를 통하여 어렵게 대화한 결과 까만 잡동사니 백을 찾을 수 있었다.
일출산으로 가는 길은 완전 산길이었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다는 불안감에 일출산을 포기할 마음도 있었다.
내가 운전하고 있었다. 아들은 잠이 모자란 듯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계속되는 커브길에서 내 운전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운전을 왜 이렇게 해? 커브길에 진입하기 전에 속도를 줄여야지. 커브길에 진입해서 속도를 줄이다가는 사고 나기 십상이야. 회사 내에서 회사 시험차를 운전하다가 직원들이 가끔 사고를 낸다고. 내 동기도 스팅어를 배수구에 처박았다고..." "헐... 내가 운전이 만 40년이 넘고 대형버스 면허에 오토바이 면허까지 없는 게 없는데... 그리고 내가 널 운전연수도 시켰는데..." " 경험이 많다고 운전 잘하는 거 아냐. 차 세워. 내가 운전하게..." 나이 들면 감각이 떨어진다. 나도 이젠 나이 들었나 보다. 그리고 오늘 내 맘이 좀 급하다. 나 때문에 아침에 30분 이상 지체했고 일출산에서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국도에서 벗어나 일출산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길 입구도 너무 좁아 지나치기도 했다. 교행 하기 힘들 정도로 좁은 구간도 있고 능선 위의 그늘진 곳은 간간히 빙판길도 있었다. 당연히 운전은 운전병 출신인 아들이 했다. 30킬로 정도의 길을 가는데 거의 한 시간 정도 소요된 것 같다. 예상보다 많이 걸렸다. 국립공원안내소가 있는 넓은 주차장은 일요일임에도 텅 비어 있었다. 구글맵으로는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750미터라고 나오는데 이정표를 보니 정상까지는 1.9킬로나 된다. 그리고 예상 소요시간은 55분. 시간은 이미 12시를 넘었지만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잔설이 남아 있는 잘 다듬어진 등산로를 따라 40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 해발 1695 미터인 정상에 오르자 동쪽으로는 태평양 바다가 보인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기 위해 완벽한 장소임에 틀림없다. 부근에선 가장 높은 산이라 동쪽을 제외한 다른 방향은 무수히 많은 산들이 겹겹이 근사한 경치를 만들고 있다. 1695 미터를 차에서 내려 40분 만에 오를 수 있다니...
이제는 간사이공항까지 달려야 한다. 두 시간 이상의 산길을 운전한 아들한테 운전대를 넘겨받아 달리기 시작했다. 일요일 오후에 공항이 가까워 오면서 이제는 차들과 집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신호등도 많아지고 고속도로 진입 전에는 예상치 못한 교통정체까지 있었다. 공항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도 채워야 하는데 다섯 시까지 반납할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된다. 갑자기 아들이 한마디 한다. “왜 이리 운전을 난폭하게 해? 좀 우아하게 할 수 없어? 늦으면 돈 좀 더내면 되잖아. 우아하게 살고 싶다며??” 갑자기 헛웃음이 나온다.
“허걱.”
P.S. 결국 주유소에는 다섯 시 도착. 기름 풀 탱크 채우고 렌터카 주차장 도착은 다섯 시 20분이었다. ETC를 정산하며 느낀 것은 일본 고속도로 요금이 매우 비싸다. 한국의 세배는 되는 것 같다. 3일 동안 400킬로 이상을 달렸는데 연료비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기름값이 한국과 비슷한데 소형차 연비가 매우 좋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