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발리에 왔다.
1월 초에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1월이 여름인 남반구로 떠나든지 따뜻한 남쪽나라가 행선지였다.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발리는 항상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신혼부부나 연인들이 풀빌라에 머물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 홀로 배낭여행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 생각했다. 인도네시아 관광청이 광고하는 사진을 어디선가 보고 가을학기 시작할 때 혼자 비행기표를 끊었다. 7시간이 넘게 걸리는 직항을 포기하고 상해 푸동공항에서 환승하는 중국 동방항공 비행기표를 끊었다. 발리를 빨리 급하게 가야 할 이유는 원래 없었고 직항편의 거의 반 값에 중국 비행기의 서비스와 푸동공항을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상해 푸동공항에서 네 시간을 보냈다. 시간 보내기는 나쁘지 않았다. 공항 라운지도 쾌적했고 음식들도 신기했다. 붐비지 않아 혼자 시간 보내기에 좋았다. 상해 푸동에서 발리 덴파사까지 비행시간만 여섯 시간이 넘는다. 동남아 중에서 가장 멀다.
발리는 수많은(17,500여 개)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어중간한 크기의 섬이다. 이슬람교가 대세인 인도네시아에서 발리는 많은 힌두교 사원을 갖고 있다. 자연과 어우러진 사원들이 독특한 경관을 연출해낸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치에서 사람들은 서핑을 하고 스쿠버 다이빙을 한다. 그러나 머리를 물속에 넣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내겐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발리섬의 서쪽 해변에선 일몰을 동쪽 해변에선 일출을 볼 수 있다. 국제공항이 있는 덴파사는 발리섬의 남쪽 자락에 있어 덴파사는 양쪽으로 해변을 갖고 있다.
덴파사 공항에 새벽 한 시에 도착했다. 좀 황당하게 넓은 입국심사장에 패스트트랙이 있다. 승무원을 위한 심사대 옆에 5살 미만의 어린이를 동반하거나 60세 이상의 노인을 위한 창구가 별도로 있다. 아주 떳떳한 표정으로 빳빳이 머리를 들고 그 줄에 섰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많아 별로 빠르진 않았다. 한참 뒤에야 컨베이어 벨트에 떨어진 빨간 배낭을 둘러메고 100불 환전이랑 유심을 사고 수많은 택시 호객꾼 들을 물리치고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장에 그랩 픽업 포인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벽 두 시인데 공항 밖은 후덥지근하다. 온도는 27도. 1월의 발리는 우기이고 최저기온은 항상 26도 이상이다. 발리 여행의 좋은 계절은 여름이란다. 발리가 적도 이남이라 이때가 발리는 겨울이란다. 건기이고 최저기온도 낮단다. 나는 그 사실을 비행기표 사고 나서 알았다.
인천 공항에서부터 읽던 책이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일흔 살 정도의 마루야마가 쓴 산문집인데 제목부터 매우 도발적이다. 내용도 그에 못지않다. 부모를 버려라. 가족을 해산해라. 국가는 당신에게 관심 없다. 직장인은 노예다. 신 따위는 개나 줘라. 애절한 사랑 따위 같잖다. 인생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동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죽어라. 거의 불온서적 수준이다. 성인이 된 아들에게 카카오톡으로 필독할 것을 강추했다. 부모를 버리라고??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신을 만들어냈다.’
‘사회주의 국가는 현실에 너무 동떨어진 이념때문에 붕괴했다. 자본주의 국가는 현실에 너무 맞추다보니, 즉 욕망에 너무 충실하다보니 붕괴하고 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를 방해한다. 부모, 국가, 직장, 종교, 사랑 등등이...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고 말은 하지만 속물근성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자유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청산하고 자신의 한 번뿐인 인생에만 집중하며 독립적인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유를 만끽하라는 것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구속됨 없이 자기 의지대로 행하는 것이다. 부모에 기대지 않고, 혜택을 볼 까하여 국가나 직장에 소속되어 구속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사회의 법이나 규범, 관습 등이 구속일 수 있지만 그것들도 이성적으로 자신이 판단하라는 것이다. 사회의 가치나 기준은 항상 변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밀고 나가라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오토바이를 타고 산길을 내달릴 때 자유를 느낀다. 마루야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오전에는 소설을 쓰고 오후에는 달린다. 그러면서 자유를 만끽한다.
나는?
방학마다 배낭 메고 혼자 낯선 곳을 헤맬 때 자유를 느끼는 것 같다. 낯선 곳에 혼자 있으면 온 신경이 곤두 선다. 이방인이라서 그렇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나의 존재를 실감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실존하고 있음을. 그리고 자유를 느낀다.
그래서 지금 어쩌다 발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