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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Sep 23. 2021

어르신도 장애인

'선량한 차별주의자'였다.


대학 동기 등산 모임이 있다.


1981년에 대학을 함께 졸업한 학과 동기는 80명쯤 되지만 등산모임 밴드에 가입한 동기는 25명 정도다. 매 월 하는 정기 모임 참석 인원은 4명 내지 8명이다. 이즈음 나는 거의 개근하고 있다. 참석하는 동기들은 나처럼 정년퇴직이 얼마 안 남은 교수들과 이미 은퇴한 할아버지들이다.


정년퇴직(교수는 만 65세가 되면 다음 학기를 시작할 수 없다)이 얼마 안 남은 교수를 학교에서 보통 원로교수라 부른다. 원로교수는 정년퇴직과 함께 명예교수가 된다. 명예교수란 순전히 호칭만 있는 것이다. 학교와 아무런 연결이 없다. 학교 이메일 정도 계속 사용할 수 있고, 간혹 강의를 하면 외부 강사료를 좀 더 후하게 주는 것 말고는... 나는 환갑이 지난 교수(나 자신을 포함하여)를 연로 교수라고 부른다!


매달 세 번째 토요일 하던 등산 모임이 이번 학기부터는 금요일로 변경되었다. 토요일은 휴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는다. 지난 5월 토요일 모임은 아침 10시 송추에서 시작이었다. 구파발역에서 송추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북한산 가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아침 통학하던 버스가 생각났다. 연로하신 동기들이 만원 버스에 올라타느라 다들 애를 먹었다. 콩나물시루로 비유되는 버스 안에서 콩나물처럼 바로 서 있느라 무척 힘들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나만 이런 버스 다시는 타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등산모임을 리드하는 동기가 다음 달부터는 금요일로 정기모임을 변경하겠다고 선언했다. 평일에도 시간 많은 은퇴한 할아버지들과 연로 교수들이 굳이 토요일에 사람 붐비는 산을 만원 버스 타고 찾을 이유가 있겠냐며...


올해 2021년은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이미 무릎이나 발목에 퇴행성 변화를 겪고 있는 동기들이 많아져서 가파른 산을 함께 오르기는 무리다. 어르신이 되면 걸음걸이가 확연히 달라진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심하게 달라지느냐가 문제지 노화는 피할 수 없다. 내 걸음걸이도 천천히 변화하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혼자 걷는 것보다 같이 걷는 것을 좋아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걷는 것보다는 그래도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걷는 것을 선호한다.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대화의 소재를 풍부하게 한다. 9월 정기 모임에서 마지막 구간인 우이령을 넘으면서 북한산 둘레길 완주가 이루어졌다. 다음 달부터는 더 평탄한 서울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지난 7월의 구간은 무려 15킬로였는데 나는 12킬로를 걷고 하산했다(중도 퇴장). 더운 날씨에 온 몸이 땀으로 젖어 몸에 무리가 가고 있다는 신호를 느꼈다. 마저 끝낼 수는 있겠지만 후유증이 걱정되었다. 적당한 지점에서 홀로 하산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센서가 있다. 센서들의 신호를 두뇌가 받아 판단하고 명령을 내린다. 나이 들면 이런 센서들이 고장 나기 시작하고 판단을 내리는 두뇌도 시원찮아진다. 고장 난 센서 때문에 육체의 이상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둔해진 두뇌가 빨리 결정을 못 내리면 탈이 날 수 있다. 심하면 헬리콥터를 불러야 할 수도 있고, 산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들이 심심치 않게 뉴스에 난다.


'기분 나쁜 말로 인해 우리가 계속 힘든 이유는 그 말을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해서입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흘려보내고 사실이라면 사실만큼만 인정하면 됩니다. 그것이 건강함입니다.'


정신과 의사 문요한의 글에서 읽었다. 어르신이란 일종의 장애인이다. 본인이 이제는 장애를 갖게 되었음을 인정하면 본인의 삶이 편해지고 주변 사람들도 대하는데 여유가 생긴다. 모든 어르신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거나 쉽게 분노하는 성질 고약한 노인네를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분노조절 장애를 갖고 있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참고 인내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등록된 장애인의 수가 250만이라고 한다. 이 중에는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를 인정받은 어르신들이 포함된 숫자라고 생각한다. 국가로부터 장애를 아직 인정받지 못한 어르신들이 많다. 장애인은 어떤 수준이든 어떤 형태의 돌봄이 필요하다. 유아, 어린이 그리고 노인들도 돌봄이 필요하다. 그러니 실제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은 국가 통계보다 훨씬 많다. 사회의 모든 인프라와 시스템은 완전한 정상인을 대상으로 만들어져 있으니 장애가 있는 사람이 불편과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당한 호소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회에 대해 분노하는 것도 당연하다.


청각장애가 있는 소설가와 휠체어를 타는 변호사가 함께 만든 책 '사이보그가 되다'를 읽었다. 나도 이제는 장애인의 문턱을 넘고 있다고 생각하며... 미국에서는 전 국민의 20%가 장애를 갖고 있다고 간주한다고 한다. 스웨덴에서는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이민자들도 언어 장애가 있는 것으로 보고 국가가 배려한다고 한다. 선진국이란 장애가 있는 사람도 존엄을 지키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회다.


"모든 사람이 유능한 세계보다 취약한 사람이 편안한 세계가 바람직한 미래다." 김초엽

"타인이란 애초에 온갖 바이러스와 세균, 편견과 다른 생각, 동의하기 어려운 이념의 운반체다." 김원영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만연하지만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런 편견과 차별을 느낄 수 없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이것도 책 제목)들이기 때문이다. 노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만연하다. 노인이 되어보지 않고는 그런 편견과 차별을 느낄 수 없다. 나 역시 선량한 차별주의자였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는 엄청난 배려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르신도 장애인이다. 쉽게 분노하는 성질 고약한 노인네는 분노 조절 장애가 생긴 것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지난 인생이 왠지 억울하고 남은 인생은 두렵다. 억울한 마음에 두려운 마음에 남 탓을 하는 것이다.  부모 탓, 배우자 탓, 자식 탓하지 못하면 국가와 사회의 지금 이 환경이 매우 못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분노한다.

이즈음 구름이 장난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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