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죽음을 생각한다.
어제가 벌써 입동이라는데 아직 단풍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아파트 도로에 떨어진 낙엽이 어마 무시하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단풍이 매년 조금씩 늦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난주 골프장에서 눈이 시리도록 빨간 단풍을 보았다. 단풍나무 뒤에는 노란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도열하여 빨간 단풍이 더욱 돋보였다. 아름다운 순간을 영생시키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설마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려니 하면서...
저녁 뉴스에서 단풍구경 온 인파로 내장산 진입로가 정체되었다고 한다. 주차장이 모자라는데 엄청난 차량과 사람들이 몰리니 당연하다. 설악산의 단풍보다 내장산의 단풍이 더 화려해서 유명하다. 설악산의 단풍은 10월 중순이지만 내장산의 단풍은 11월 초순이다. 11월 5일이 절정이라고 정확히 기억한다. 11월 5일 친구 부부와 함께 골프를 쳤다. 친구 부부는 대학 1학년 때 만나 지금도 같이 살고 있다. 남편인 친구를 대학 2학년 초부터 함께 했으니 44년째 그들을 보고 있다.
"OO엄마 어제 생일이었네! GB가 생일 선물로 뭐해줬어?"
"마음만..." 친구가 경상도 진주까지 출장 갔다 오느라 아무것도 아직 못해줬다고 변명을 한다. 그러면서 남의 마누라 생일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올해도 내게 핀잔을 준다. '기억이 기록을 이기지 못한다'는 스마트 스코어 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내 기억이 좀 별난 것은 친구 아내와 생일이 같은 여인을 대학시절에 사귄 적이 있기 때문이다. 11월 4일이 생일인 사람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디서 내장산 단풍은 11월 5일이 절정이란 것을 읽거나 들은 것이다. 그래서 11월 초가 되면 내장산 단풍과 11월 4일이 생일인 여인들과 내 대학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비문증이란 것이 있다. 날파리 여러 마리가 보이는 것 같아 날파리증이라고도 한다. 한 오 년 전부터 가끔 날파리들이 잠깐 보이기 시작했다 없어진다. 금세 없어져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날파리가 아니고 검고 가는 실 같은 것들이 왼쪽 눈 왼쪽에 몇 주 전에 갑자기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밝은 햇빛 아래서 선명하게 보이고 눈동자의 움직임에 따라 거미줄 같기도 한 실들이 움직인다. 이것도 비문증의 일종이란다. 광시증이란 것이 있다. 반짝하는 빛이 눈을 깜박이는 순간 보이는 것이다. 밝은 곳에서는 안 보이다가 지하주차장에서 보이고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갈 때는 자주 보인다. 비문증이나 광시증 모두 안구를 채우고 있는 유리체가 노화되어 생기는 것이란다. 유리체 안에 이물질이 생기거나 유리체가 액화하여 비문증이 생기고 유리체와 망막이 마찰을 일으켜 광시증이 생긴단다. 망막이 떨어져 나오는 망막박리가 아니라면 시력에는 문제없으니 그냥 살란다. 나보다 서너 살 많은 안과의사는 내 망막을 살펴보더니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안과의사인 자신도 왼쪽 눈에는 30대부터 오른쪽 눈에는 50대부터 비문증이 있다고...
지난 4월 돌아가신 아버지는 80대 초반에 황반변성이 시작되었다. 시력을 잃을 수도 있는 황반변성도 노화의 한 모습이다. 다행히 진행을 늦추는 좋은 약이 개발되어 몇 주 간격으로 안구에 수십 번 주사를 맞았다. 아버지는 황반변성을 노화로 받아들이지 않고 일종의 암으로 생각했다. 새로운 암 치료 방법이 계속 나오고 암을 완치했다는 뉴스처럼 황반변성도 완치되기를 소망하셨다. 눈 부시다고 커튼을 드리운 방에 기거하며 눈에 나쁘다고 TV도 더는 보지 않으셨다. 외출 시에는 항상 짙은 색의 선글라스를 끼고 자외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하셨다.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걱정을 하느라 걱정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10년여를 살다가 가셨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매년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며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며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죽음이 두려워 아예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보다 좋은 일이다. 엊그제 읽은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에 나오는 난정은 죽음을 잊기 위해 쉬지 않고 읽는다. 끊임없이 읽는 것이 죽음을 잊고사는 방법이라고 했다. 난 낙엽을 보며 죽음을 생각하고 노을을 보며 죽음을 떠올리며 오늘 저녁도 만찬을 즐기며 살겠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초밥을 먹어야겠다. 사케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