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의 운명
일 때문에 대전에서 잤다. 예전 같으면 밤에라도 운전해서 집에 왔겠건만 이젠 밤길 운전을 가능한 피하고 싶다. 비즈니스호텔 방은 작았지만 침구가 좋았다. 그리고 넷플릭스를 볼 수 있다. 예전에 넷플릭스 무료 한 달 보고 한칼에 끊었다. 너무 재미있는 프로가 많아서...
오징어 게임 이후 핫하다는 6부작 '지옥'을 봤다.
“재건아, 이제 시간 됐다. 나랑 가자!”
“아니 누구여? 내 이름을 부르다니... 초등학교 동창인가? 첨 뵙는 분 같은데...”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잘 생긴 배우 공유가 한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재건아, 넌 드라마나 영화도 안 보니?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니... 저승사자란 단어는 들어봤지? 내가 바로 저승사자야! 한심한 것 같으니라고.”
“아니 근데 왜 제게 오셨대요? 저 이제 막 환갑 지났는데...”
“뭐라고? 아쉽냐? 남들보다 너무 빨리 가는 것 같니? 근데 잘 생각해봐 35년 전에 니 아내가 지민이를 막 임신했을 때, B형 간염이 재발해서 어떻게 될지 모를 때, 지민이 대학 갈 때까지 살면서 아비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 기억 안 나냐? 나 안나?"
"나요. 진정으로 기도했으니까..."
"그런데 지민이 갸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해서 이제 신년에는 심지어 둘째를 낳는다는데... 니 기도보다 얼마를 더 산거야? 무려 15년을 더 살았네.”
“그때는 그랬지만 아직 정년도 이년이나 남았고요. 정년퇴직하고 뭐할지도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무슨 상관이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지만, 이승이 끝나는 날짜는 아무도 몰라! 저승사자인 나도 내가 언제까지 이 짓을 할지 모른다고. 연옥 앞에 있는 자동발급기에서 무작위로 발급되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슬프고 억울한 죽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은 것이라고. 배 타고 수학여행 가다 빠져 죽고, 멀쩡하게 일하다 죽고, 떨어져 죽고, 음주운전자가 모는 차에 치여 죽고, 심장마비로 죽고, 암으로 죽고."
"그러면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인가요? 제 생은 딱 여기까지인가요?"
"그렇지. 네가 더 살아야 하는 이유를 댈 수 있니? 아직 돌봐야 하는 애가 있다든지, 보살펴야 할 노모가 있다든지..."
"더 살아야 할 이유? 존재 이유를 대라는 것이네요."
"맞아! 너의 존재 이유를 대봐."
한동안 침묵.
"목숨 바쳐하는 사랑을 하고 싶어요. 영화 타이타닉의 디카프리오가 하는 그런 사랑이요."
"한심한 놈이네. 할아버지가 되도록 못한 사랑을 이제야 하고 싶다고? 그 나이 되도록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니... ㅉㅉ 정말 한심한 놈이네."
"사랑이 무엇인데요?"
"사랑이란 항상 발정 나 있는 수컷과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 암컷의 결합이야. 수컷이 전립선에 문제가 생겨 더 이상 발기가 안되거나 이기적 암컷의 물질적 욕구 충족을 수컷이 못해주면 결합이 끝나고 사랑도 사라지는 거야. 죽을 나이 되도록 모르는 것은 인간뿐이야. 오랜 역사를 보나 수많은 문학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냐? 그동안 뭐했냐? 책도 안 보고. 아 맞다. 동물의 왕국을 열심히 봐도 알 수 있구먼. 사랑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말고 다른 이유 댈 것 있으면 대봐!"
한동안 침묵.
"거봐,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의 존재 이유가 없어. 넌 부양의 의무에서 해방되면서 존재가치가 없어졌어. 모든 수컷들의 운명이야! 그러니 이제 나랑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