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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Mar 15. 2023

마침내


마침내 냉장고가 죽었다.


1996년 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고 교수연구실을 배정받았다. 학교에서 철제 책상과 의자 및 철제 캐비닛을 연구실에 넣어줬다. 작은 냉장고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황학동 시장에 나가서 중고냉장고를 하나 샀다. 브랜드가 GoldStar!


GoldStar 냉장고가 오늘 마침내 생을 마감했다. 만 27년을 고장 한번 없이 작동하다가 조용히 숨을 거뒀다. 언제 죽었는지 모르겠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가끔 신경에 거슬렸는데 언제부터 조용했는지 기억이 없다. 배고플 때 꺼내먹는 두유를 꺼내다 냉장고의 찬 기운이 없음을 느꼈다. 일주일 전에 두유 한 박스를 냉장고에 넣을 때만 해도 이상이 없었다. 이번 학기까지만 강의하고, 내년 2024년 2월 전에 교수연구실을 비워야 한다. 어쩌면 교수연구실을 비우면서 잘 돌아가는 냉장고를 어쩌나 하고 고민했을지 모른다. 고민을 덜었다.


96년에 중고냉장고를 샀으니 이 냉장고는 30년 이상을 작동한 것이다. 매일 사용하는 가정집 냉장고가 아니고 가끔 여닫는 교수연구실 냉장고라 그 수명이 오래갔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지만 가전제품이 30년을 버텼다는 것은 가전제품을 설계하고 만들어 팔아서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받는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꼭 좋은 일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너무 튼튼하게 만들어 너무 오래 사용하면 신제품을 살 소비자가 없어지니까...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사망한 냉장고를 보며 사람도 이렇게 수명을 다하면 복 받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88세 제법 유명했던 어르신이 매일 하던 대로 테니스를 치고, 저녁도 잘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 날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오래전에 본 적 있다. 일상을 즐기다가 그렇게 쉽게 가는 것이 모든 어르신들의 바람 아닐까? 어떻게 살면 그렇게 갈 수 있을까?


2003년 미국 교환교수로 체류하다가 2004년 귀국하면서 미국 Whirlpool 브랜드의 세탁기와 가스건조기를 이삿짐과 함께 갖고 왔다. 지금은 미국에서도 가장 비싼 세탁기가 LG와 삼성이지만 그 당시는 아니었다. 수입된 미국 세탁기가 제법 있던 때라 한국에서도 A/S가 가능했다. 딱 한 번 수리했었다. 지난달에 세탁기가 드디어 마침내 고장 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A/S가 곤란하단다. 너무 오래되어서 부품이 없단다. 지금은 드럼세탁기가 대세지만 우리 집 세탁기는 봉세탁기다.


고장 난 부품은 더운물의 통로를 여닫는 밸브다. 찬 물로는 세탁기가 멀쩡하게 작동한다. 20년 가까이 사용한 제품이라 부품이 있겠나 하면서 Amazon에서 'Whirlpool Washer inlet valve'를 검색하니 많은 부품이 쏟아져 나온다. 세탁기의 모델 넘버를 치면 안 나오는데 Whirlpool, Maytag, Kenmoore 모두에 맞는다는 부품이 있다. 그래서 질문을 남겼다. 내 세탁기 모델이 뭔데, 이 부품이 내 세탁기에 맞냐고? 24시간도 안되어 맞는다는 답이 올라왔다. 바로 주문했다. 아마도 100불 정도 한다면 망설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국까지의 배달료 포함 22불이다. 주문한 지 일주일 만에 도착했다. Made in China.


내가 명색이 기계공학 박사인데 이 정도도 직접 교환 못할까 하며 밸브가 붙어 있는 세탁기의 뒤면을 뜯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 않다. 뒷 판에 나사다운 나사나 볼트가 아예 없다. 한 30분을 낑낑거리다 안 되겠다 싶어 유튜브를 검색했다. 세탁기 부품을 교환하는 영상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딱 일치하는 세탁기의 부품교환 방법은 없지만 미제 봉 세탁기의 분해영상이 여러 개다. 세탁기의 분해가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이었다. 봉 세탁기의 제어반을 뒤로 젖히면 뒤판과 외판 전체를 연결하는 판스프링 두 개가 드러나고, 드라이버를 이용하여 판스프링을 빼면 세탁기의 외판이 단 번에 분리된다. 이렇게 어려운 설명을 동영상으로 쉽게 보여준다. 드디어 세탁기가 분리되었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밸브 교환이 이루어졌다.


아마존과 유튜브 덕에 마침내 세탁기를 살렸다.


20년 사이에 세상이 엄청 변했음을 실감했다. 미래가 어떻게 변화할지 상상이 안된다.

그런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 내야 하는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ps. "마침내 원하는대로 운명하셨습니다."는 '헤어질 결심'이란 영화에서 탕웨이가 어색한 한국말로 한 대사이다. '마침내'가 내게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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