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까? 말까?
월요일 아침 배드민턴 출근길이다.
운전하고 가는데 선배로부터 전화가 온다.
"선배님,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한 달에 한두 번은 함께 골프 치는 대학 3년 선배다. 국내외 골프여행도 여러 번 함께 했다. 골프로 관계가 시작됐고, 골프 외에는 다른 것 없다. 그렇지만 골프를 치면서 많은 대화를 하다 보니 노후를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세히 알고 있다.
"응 난데, 요새 바빠?" 좀 이상하다. 요새라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바쁘냐니? 겨울이 오면서 함께 골프친지는 몇 주 됐다.
"바쁜 일 없어요. 한가하지는 않지만..." 사실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로 일상이 채워지고 있다. 오늘 꼭 해야 할 일은 거의 없다.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없다고 봐야 한다. 애들 키우며 일하느라 바쁜 딸을 위해 가끔 손주 하원 시키는 일을 부탁받지만 이것은 부탁받는 일이다. 내가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주 목요일 4박 5일로 일본 구마모토에 골프투어 가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아파서 자리가 났어. 같이 안 갈래?" 내가 이즈음 배드민턴 중독이라 골프가 좀 시들해졌다는 것을 선배는 알고 있다. 목요일 출발 해외여행을 월요일 아침에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선배가 골프친구가 많아도...
"지난주에 일주일 방랑하고 금요일 귀국했는데, 또 비행기 타기는 좀 그런데..."
"위약금 물어야 하니까 그만큼 싸게 해 줄게. 웬만하면 같이 가자." 가성비가 아주 좋다는 얘기다. 구마모토는 가본 적 없다. 마음이 동하기는 하지만, 금요일 오후마다 딸이 부탁하는 손주 하원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지난주 방랑을 토요일 출발해서 금요일 아침에 귀국한 것도 손주 하원시켜 줄 요량으로 일정을 그렇게 잡았던 것이다.
"어려워요."
"그럼 할 수 없지. 아쉽네."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확실히 거절했다.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여지를 남기고 계속 고민하는 것이 싫었다. 다른 것 고민할 것도 많은데... 그렇지만 배드민턴 운동복을 갈아입는 탈의실에서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리 선배가 발이 넓은 사람이라도 이렇게 촉박한 골프투어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 찾아내긴 어렵다.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으면, 정작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 엄청 속상하다.
누구와 가는지 묻지 않았다. 선배 말고 나머지 두 명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선배의 고등학교 동기일 확률이 제일 높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면 누구와 가는지를 처음부터 얘기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과, 목요일 출발이고, 특별히 가성비가 아주 좋은 일본 구마모토 골프투어를 갈까 말까를 고심하고 있었다. 확실히 거절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 사이에 빈자리를 채웠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마침내 내 일정표를 열어 봤다. 금요일 동기 등산모임에 참석한다고 밴드에 썼다. 8명 정도 모이는 모임이기에 나 없어도 크게 아쉬워할 것은 없다. 못 간다고 번복하면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한소리들 하겠지만, 2주 뒤 다음 모임에서 내가 밥사면 친구들은 좋아할 것이다.
금요일 오후에 손주 도민이 하원시켜 미술학원에 데려다주는 것을 못하겠네. 그렇지만 이런 일이 마음에 걸려 다른 무엇인가를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 말고도 해줄 사람 찾을지 모르고, 최악의 경우는 아르바이트생이라도 찾으면 된다.
‘불백'이란 용어가 생각났다.
자식이라고는 딸 하나인 친구가 있다. 대기업 임원을 하고 중국 법인장까지 몇 년 하고 몇 년 전에 은퇴했다. 동기 등산 모임에 아주 가끔 참석한다. 자주 참석 못하는 이유가 손주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딸과 사위가 모두 일하고, 아직 아내가 지방 대학교수라 오후에 손주들(?)을 봐줘야 한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손주들 학원 보내고 받고 하느라 등산 모임 나오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불백'이라고 했다.
"불백이라니? 거기서 불고기백반이 왜 나오냐?"
"너 모르는구나. 불백은 불고기백반이 아니고 불쌍한 백수야!"
"하하."
"그럼 화백도 모르고 평백도 모르겠네. 화백은 화려한 백수, 평백은 평범한 백수야."
내 꿈은 우아한 노인이다. 불백이 우아한 노인일 수 없다. 화백이어야 한다.
불백이고 화백이고 남이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되는 것이다. 내가 정하는 것이다.
우아한 노인 화백이라면 구마모토를 갈까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