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부의 리조트 비치에서 저녁노을이 장관이다.
태양이 열일하고 퇴근하는 광경은 많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근사한 많은 사진들과 영상이 이 광경을 붙잡아두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곧 35살이 되는 아들과 단 둘이 이 광경을 보고 있다. 둘 모두 손에는 맥주캔을 들고 있다.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보며 내가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항상 그렇다. 아들과 대화는 힘들다.( https://brunch.co.kr/@jkyoon/612 )
"와우! 하늘이 장관이네. 아들! 그렇지?" 당연한 것을 굳이 동조할 필요 있을까?
침묵이 흐른다.
"와! 이런 저녁노을을 바닷가에서 젊은 연인들이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침묵이 흐른다.
"가슴이 설레지 않을까? 이 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 대단한 인연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까? 넌 그런 경험 많잖아. 허구한 날 바다에서 사니까. 난 그런 경험 별로 없어서 궁금하네...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야. 얘기 좀 해봐. 여자 친구랑 바닷가에서 저녁노을을 함께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침묵이 흐른다.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아. 이 여자의 일생을 책임지겠다고 하면 이 여자가 평생 나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없을까? 혹시 더 좋은 여자를 만날 기회를 내가 차버리는 것은 아닐까?
여자는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아. 혹시 이 남자가 결혼하자고 하면 할까? 말까? 이 남자가 과연 평생 내게 헌신하면서 내가 낳게 될지도 모를 아이들에게도 충분히 좋은 아빠가 되어 평생 나와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 혹시 더 근사한 남자를 만날 기회가 내게 오지 않을까?
아들 어때? 그렇지 않을까? 내 생각에 동의해?"
침묵이 흐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있는 듯도 한데...
"남자는 여자에게 인정과 존중을 요구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헌신을 요구한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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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아들이 한마디 했다.
"맥주 다 마셨으면 들어가자!"
p.s. 저녁노을이 장관인 시간이 세부 모기들의 저녁 만찬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