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속에 방랑 중이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으로 걸어가는 길이다.
엊그제 공항에서 지하철(S Bahn)을 타고 중앙역 지하에 도착하여 큰길을 지하도로 건넜다. 그런데 지하도에서 소변 찌린내가 진동을 했다. 소방차 호스로 지하도를 확 씻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은 지상의 횡단보도를 건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쾰른으로 갈 생각이다.
이틀 전에 DB Navigator(Deuche Bahn)로 봤을 때는 36유로였는데, 당일 기차역에서 발권하니 50유로다. 미리 계획을 확정하면 돈을 절약할 수 있지만, 방랑길을 미리 확정한다면 방랑이 아니다. 쾰른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어젯밤이었다. 쾰른의 숙소 예약도 하지 않았다. 기차표를 사고 쾰른 숙소 예약을 했다. 어디로 방랑을 할지 망설이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처제가 자기 집으로 오란다. 춥고 을씨년스러운 프랑크푸르트에서 뭐 볼 것이 있냐며... 마음이 흔들렸다. 처제 말이 맞기도 하고, 처제한테 가면 숙박과 식사가 모두 결정되니, 애매모호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도 없다. 그렇지만 내가 바라던 방랑이 아니고 친척 방문이 된다.
어제 딸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생각해 보니 프랑크푸르트 가 본 적 있다며. 코블렌츠에서 숙박하고, 본을 거쳐 쾰른을 갔었는데 라인강변을 따라가는 기차가 정말 좋았다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쾰른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기차는 한 시간 반이면 간다. 그러나 코블렌츠, 본을 거쳐 쾰른으로 가는 기차는 두 시간 반이상이 걸린다. 그렇지만 목적이 없는 방랑이니 라인강변의 경치를 보며 유랑하는 것을 택했다.
기차표를 사는 순간 7분 지연이라던 기차는 점점 시간이 늘어나 결국 33분 지연이었다. 플랫폼에서 거의 30분을 떨면서 기다렸다. 날씨는 방랑하기 딱 좋은 날씨다. ICE 1020편의 도착 플랫폼 넘버가 계속 바뀐다. 결국 기차 도착 3분 전에 1번 플랫폼으로 변경되었다. 거의 뛰다시피 6번 플랫폼에서 1번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기차의 좌석 지정을 하면 5유로를 더 지불해야 한다. 이미 14유로를 더 지불했다는 생각에 좌석 지정을 하지 않았다. 빈자리에 앉아서 가면 되는데, 라인 강을 제대로 보려면 오른쪽 창가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차 머리 위 선반에 좌석번호가 있고, 번호 옆에 구간이 쓰여 있거나 아무 표시 없거나 'Vorrangplatz'라고 표시되어 있다. 구간이 쓰여 있는 것은 누군가 그 구간의 좌석을 지정했다는 것이다. 'Vorrangplatz'는 빈자리라고 나름 예상하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나중에 확인하니 노약자 임산부 우선석) 다음 정차 역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역이다. 공항역에서 많은 사람이 내린다. 빈자리가 넘쳐난다. 가운데 테이블도 있는 마주 보는 좌석에 오른쪽 창가에 순방향인 자리로 옮겼다. 에쎈에서 함부르크까지 누군가 지정한 자리다. 에쎈이 쾰른 다음역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 내게 딱 안성맞춤이다. 열차의 인터넷도 빠르다.
비스듬히 맞은편에 40대로 보이는 독일(?) 아줌마가 혼자 앉아 있다. 두 개의 스마트폰을 번갈아 보며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테이블에 맥북을 펴 놓았다. 창 밖으로는 늦가을의 을씨년스러운 독일 풍경이 쏜쌀같이 흐르고 있다.
마인츠를 지나면서 라인강이 보이기 시작한다. 라인강이 별로 깊어 보이지 않는다. 끊임없이 준설을 해야 제법 큰 배들이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긴 크루즈선들이 보인다. 앞쪽에는 식당이 있고 뒤쪽에는 선실이 마련된 크루즈선들과 컨테이너 박스를 잔뜩 실은 화물선들도 많이 보인다. 강 건너는 야트막한 산이 끝도 없이 길게 계속될듯하다. 강이 꺾어지는 산 정상에 고성이 보인다. 저 고성에서 물은 어떻게 확보했는지 궁금하네. 그 옛날 펌프가 있었을 리도 없는데... 성 밑에는 강변 마을들이 있다.
코블렌츠 역에서 열차가 사람들로 꽉 찼다. 내 옆자리에도 독일 여인이 앉았으니 이제는 화장실도 갈 수 있고 열차도 둘러볼 수 있겠다. 쾰른이 가까워 오면서 열차가 서행하기 시작한다. 독일어 방송이 나오고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구글맵으로 확인하니 라인강을 건너자마자 쾰른 중앙역이다. 아직 강을 건너지 않았는데 기차가 정차했다. 옆에 앉은 독일 아줌마에게 물으니 이 기차가 중앙역에 정차하지 않는단다. 여기 내려야 한단다. 기겁을 하고 짐을 챙겨 일단 내렸다. 그리고 사람들을 따라 S Bahn(지하철) 한 정거장을 타고 중앙역에 도착했다.
난 분명 중앙역 가는 기차표를 샀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쾰른 중앙역 플랫폼이 너무 붐빈단다. 일종의 병목이란다. 그래서 라인강 건너의 쾰른 메쎄 도이츠역을 애용한다고 나무위키에 설명이 있다. 그리고 독일의 열차가 지연이 많아 환승 열차를 놓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단다. 소위 시스템이 엉망이란 얘기다.
중앙역을 나오니 쾰른 대성당 바로 앞이다. 두 개의 첨탑이 눈앞에 서 있다. 국민학교 교과서에 쾰른 대성당 사진이 있었다. 고딕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설명되었던 것 같은데, 하늘을 찌를 것 같던 두 개의 첨탑을 기억한다. 그것을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그렇지만 눈앞의 첨탑은 기억 속 사진의 첨탑보다 훨씬 뚱뚱(?)하다. 아마도 교과서의 사진이 뾰족하게 보정된 것이었거나,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내 기억이 수정된 것이거나...
성당 주변은 사람들로 붐빈다. 쾰른에서 볼 것이라고는 이 성당 밖에 없는지 관광객들이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성당 옆 광장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 사이를 뚫고 캐리어를 끌며 호텔을 향해 나아간다. 어디서 읽었다.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정체되어 있는 일상에서 지루함을 느끼다가 이동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여행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발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는 것이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고 새로운 곳에서 먹고 자면서 일상을 벗어나 인생의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환상 말이다.
환상 속에 방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