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빌라(Poolvilla)

Episode 5

by 재거니


"일어나 아침 먹어!"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깼다.


지난밤 1시에 클락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선배의 차를 타고 앙헬레스 외곽의 주택에 도착하여 거실에서 맥주 한잔하고 샤워하고 잤으니 거의 새벽 3시경이었다. 서울과는 한 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새벽 네 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시계를 보니 아침 아홉 시가 조금 넘었다.


어젯밤에도 느꼈지만 침구와 타월에서 하이타이 냄새가 난다. 충분히 헹구지 못해서인지, 세제를 과하게 사용한 것인지, 린스의 냄새인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 맡던 하이타이 냄새 같다. 그 당시 샴푸는 레브롱 샴푸라는 것이 있었다. 짙은 오렌지 색깔의 샴푸는 냄새가 참 좋았다. 중학교를 버스 타고 다녔다. 출근시간은 상상하기 힘든 만원 버스였다. 까까머리의 중학생은 버스 안에서 샴푸 냄새를 맡았다. 출근하는 긴 머리 여자의 엉덩이 뒤에서 향긋한 샴푸 냄새를 맡으며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교복 바지주머니에 넣은 오른손에서 딱딱한 물건이 만져졌다.


하이타이 냄새가 레브롱 샴푸 냄새를 불러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넓은 거실에는 큰 소파가 TV를 향해 디귿자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3-2-1-1 베이지색 가죽소파다. 거실 한쪽에 큰 식탁이 있다. 족히 10명은 앉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여러 사람이 앉아 있다. "여기 앉아." 하고 내 자리를 지정해 주는 선배 말고는 모두 초면인 사람들이다. 나를 포함하여 다섯 명의 한국 남자가 있다. 세 명의 아리송한 필리핀 여자와 복장이나 생김새로 메이드가 확실한 키 큰 할머니가 있다. 필리핀인 치고는 정말 크다. 나보다 클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모델이었을지도 모른다.


8명이 식탁에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는다. 선배가 남자들을 일일이 소개해준다. 집주인이 김사장이고, 나와 같은 투숙객이 송사장, 윤사장 이란다. 사장이란 호칭이 너무 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사장들은 회장이란 호칭으로 불리기를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세 명의 필리핀 여자들이 누구와 커플인지는 금세 알겠다. 30대로 보이는 여인은 집주인의 아내고,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둘은 송사장과 윤사장의 짝이다. 사실 여자들의 나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식탁 위로 영어와 한국말이 뒤섞여 날아다닌다. 간혹 타갈로그어도 끼어든다.


이 상황이 영 어색하다. 당연한 것 아닌가? 시트콤 드라마 촬영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법 오래된 집이다. 1층에는 큰 거실과 부엌이 있다. 거실의 한쪽에 큰 식탁이 있다. 북쪽으로 나있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방이 하나 있다. 현관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올라서면 작은 거실이 있고 좌우로 방이 두 개씩 있다. 총 5개의 방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방마다 화장실과 욕실이 있다. 1층 거실의 반 정도는 천장이 뚫려있어 거실의 개방감이 좋다. 정원에는 타일이 군데군데 깨져나간 수영장 즉 풀이 있다. 풀은 수영을 하기보다는 여름만 있는 앙헬레스의 더위를 식히는 용도라고 보인다. 바닥에 30센티 정도 물이 차있다. 네 마리의 개구리가 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작은 풀을 벗어나지 못하는 개구리들에게서 내 인생이 보인다. 낙엽들이 수면을 덮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용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이 집에서 숙식하는 동안 메이드의 도움을 받을 것 같아 집주인에게 물었지만, 메이드 이름을 주인도 모른단다. 몇 년을 있었지만 항상 '아떼'라고 부른단다.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사람들은 노예나 죄수 아니던가?


버려진 골프장에 면한 집이다. 소유권 문제로 소송이 진행되고 있어 골프장은 몇 년째 운영되지 못하고 있단다. 관리되지 않는 골프장에 면한 풀빌라 역시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 외벽 곳곳에 페인트가 떨어져 나갔고, 그늘진 구석은 이끼와 곰팡이들로 덮여 있다. 들뜬 대리석 바닥 타일은 여기저기 삐걱거린다.


집주인은 근처 깨끗한 신축 풀빌라에서 한국 골프관광객을 받는다고 한다. 공항에 도착하는 한국 골퍼들을 픽업하여 풀빌라에서 재우고 먹인다. 매일 골프장까지 왕복 교통편을 제공하고, 관광객의 온갖 요구(카지노 및 유명음식점 예약, 출장 마사지, 그리고 밤문화)를 들어주면서 수십 년째 필리핀에 살고 있다.


앙헬레스는 완벽(?)한 오락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