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 소설에 대한 소개를 어디서 읽고 언젠가는 읽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 동안 잊고 지냈는데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최근에 또 어디선가 읽었다.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것이었다. 디아스포라에 관심이 많은 아주 젊은 영화감독이 내 주변에 있다. 그렇게 파친코란 소설이 점점 내게 다가왔다.
산속에 농막을 짓고 독거하는 친구가 있다.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그 농막을 방문하는데, 농막의 책꽂이에서 파친코를 보았던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친구야 내가 농막에서 파친코를 봤던 것 같은데..." 그렇게 파친코가 내 손에 도착했다.
제법 활자들이 빽빽하고, 제법 두꺼운 책이 1권과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계 미국인이 영어로 쓴 소설이라 번역된 것이다. 번역된 소설은 저자만큼이나 역자의 문장력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은 처음 읽기 시작할 때 힘들다. 역치(Threshold)가 존재한다. 완전히 새로운 공간과 시대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하고, 생소한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 쉽지 않다. 누가 주인공인지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내가 공감하기 쉬운 인물이라면 그래도 쉽게 역치를 넘을 수 있다.
역치를 넘고, 반 이상을 읽은 다음에 나는 독후감이나 비평문을 찾아 읽는다. 그러면 결말이 그려지고 후반부를 음미할 수 있다.
무려 5대에 걸친 이야기다. 누구는 4대라고도 하던데 분명 5대다. 아마도 도입부의 훈이 아버지 어머니를 흘려 지났으리라 생각한다.
장애를 가진 훈이의 유일한 딸 '선자'가 주인공이다. 5대에 걸쳐 워낙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토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떠올랐다. 20대 청춘기에 정말 힘들게 읽었던(?) 아니 끝을 간신히 보았던 그렇지만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장대한 소설이었다. 낯선 러시아 이름들이 이탈리안 음식점의 파스타 메뉴처럼 다가와 기억하고 집중하기 힘들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끈기와 인내력 테스트였다.
파친코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곳곳에서 전개되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심리적 묘사와 정사 장면이 잠들지 못하고 계속 붙들게 했다. 이 나이에도 정사 장면은 한 단어도 놓치지 않고 읽어내겠다는 그 의지와 정성이 참 기특(?)하다. 어느 독후감에서 읽었다. 14살 딸이 파친코를 읽은 것을 안 엄마가 놀라며 딸에게 괜찮았냐고 묻자, 딸이 쿨하게 "이야기일 뿐이잖아!" 하더란다. 이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12살 딸이 파친코를 3일 만에 읽어버렸다고 했다.
작가가 여자라서 인지, 소설 속 여자인물들의 심리변화를 묘사하는 부분이 압권이다. '여자의 인생은 고생의 연속이다.'란 문장이 파친코의 주제문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의 생각과 의견은 무시되기 일쑤고,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가 여자의 일생을 좌우한다. 아니 결정한다.
한수는 공부하라기보다 배우라고 했다. 노아에게는 그 말이 완전히 다르게 와닿았다. 배우는 것은 일이 아니라 노는 것과 같았다.
이 문장에 공감했다. 정년퇴직하고 나는 지금 배우는 중이다.
현대에 와서 재일외국인들의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일본 사회에는 아직도 재일외국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식이 남아 있다. 어디 일본뿐이겠는가?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별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차별이 존재하는 게 맞는 걸까? 차별 없이 누구나 공정한 대우를 받는 세상은 이상에 불과한 걸까? - 옮긴이의 말에서 -
'셋이 모이면 하나가 소외된다'는 말 있다. 소외된다는 것은 일종의 차별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둘이 있으면 차별이 없나? 아니 둘이 있으면 위아래가 생긴다. 그렇지 않은가? 공정이란 이상이다.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희망하여 붙여지는 이름이다.
4일 동안 즐거웠다. 재미있는 친구가 항상 옆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토요일 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한동안 눈을 감고 많은 여자들의 일생을 그려보았다.
양진, 선자, 경희, 아키코, 리사, 유미, 에츠코, 하나, 피비.
왜 소설을 읽는가? 작가의 경험과 인터뷰 및 문헌조사 등을 통하여 작가가 상상하는 허구일 뿐인데...
호기심이다. 나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하고, 내가 보지 못하는 사회의 이면에 대한 호기심이다. 아직 이 나이에 궁금한 것 많아서 다행이다. 살만 하다는 얘기다. 어쩌면 살고 싶다는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