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가 오래 사나
우리 인간들은 왜 누가 누가 잘하나에 목매는 걸까?
어릴 때 잘한다고 칭찬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피아노를 잘 친다고, 공부를 잘한다고, 축구를 잘한다고, 인사를 잘한다고, 심지어 심부름을 잘한다고. 물론 그중의 으뜸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었다.
공부 잘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제일 강력한 무기였다.(과거형!)
배드민턴 동호회원들과 어쩌다 점심을 하게 되면 당연히 배드민턴 얘기다. 배드민턴 때문에 알게 된 사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 배드민턴 얘기 중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다른 회원들의 실력에 대한 얘기다. 남 이야기 하는 것을 인간들은 즐긴다. 누가 누구보다는 잘하고, 누구는 그렇게 오래 했는데도 어째 아직도 그 모양이고, 누구를 상대하기는 만만하고, 누구는 아주 불편하고, 심지어 누구와는 치기 싫다는 등등….
안세영이나 서승재는 세계적인 배드민턴 프로 선수들이라 매 경기의 승패가 중요하지만, 동네 배드민턴 동호회에서 누가 누가 잘하나 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땀내며 재미있게 시간 보내는 아니 인생을 흘리는 것인데…
싸움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시대가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생존이 위협받던 시대가 있었다. 극심한 가뭄이 들면 이웃 마을로 쳐들어가 먹을 것을 빼앗아야 우리가(?)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런 경쟁에 목매는 유전자가 살아남았다. 그래서 누가 누가 잘하나에 항상 관심을 갖고 내기하기를 좋아한다.
모든 조직에는 계급이 있다. 계급이 오르는 것을 승급이라 하고 승진이라 한다. 승진이 벌어지는 조직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승진에 목맨다.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승진한다. 모두가 승진할 수는 없다. 위로 올라갈수록 자리가 적어지니까… 그래서 승진을 하면 축하받고 칭찬받는다. 조직에서 오래 일하려면 꾸준히 제 때에 승진해야 한다. 계급정년이란 것이 있고, 계속 승진 못하고 낙오되면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 견디기도 힘들다.
교수는 조교수로 임용되어 부교수를 거쳐 정교수로 승진한다. 다행인 것은 이 승진이 동료와의 경쟁이 아니고 자신의 연구실적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이다. 교수의 업무는 연구, 강의, 사회봉사로 이루어져 있지만 가장 비중이 큰 것이 연구다. 평생 연구하고 가르치겠다고 교수가 된 것 아닌가? (그냥 좋아 보여 지원했다 운 좋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정년보장 교수가 되면 연구하지 않아도 짤리지 않는다. 연구가 즐거운 교수는 계속 연구만 하겠지만, 연구가 별 재미없는 많은 교수들이 총장이 되겠다고 경쟁한다. 주인이 확실하지 않은 민주적인 대학에서는 교수들의 비밀 투표 결과가 총장으로 임명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따라서 총장이 되기 원하는 교수는 투표권을 가진 교수들에게 신망(?)을 얻어야 한다. 신망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많은 것을 해야 한다. 경조사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자주 밥도 사야 한다. 대학교 안의 정치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총장의 최종 임면권은 법인 이사회에 있다. 이사들에게도 잘 보여야 한다. 이사회의 의장이 이사장이다.
정년퇴직을 하고 어르신(노인네)이 되었지만 '누가 누가 잘하나' 유전자는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제는 누가 누가 오래 사나 경쟁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누구나 이런 노인네들의 푸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참 오래 살았어. 나 아는 친구들 거의 다 죽었어. 그나마 살아있는 것들은 요양원에 누워서 오늘내일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나도 이제 갈 때가 되었어."
이런 푸념을 들으면 누구나 보통 이렇게 장단을 맞춰준다.
"갈 때가 되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아니에요. 건강하게 더 오래오래 사셔야죠."
이런 대답을 듣고 싶어 푸념을 늘어놓은 것 아닌가?
속으로는 '맞아. 내가 내 친구들 중에 제일 오래 살고 있어. 아직도 난 괜찮아. 어쩌면 너보다도 더 오래 살지 몰라.'를 외치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너무 냉소적인가?
누가 누가 오래 사나? 경쟁에서 이기려면 많은 것을 참아야 한다.
그렇게 잘 마시던 술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끊고, 그렇게 오래 피우던 담배도 멀리 해야 한다. 헬스클럽에서 열심히 페달을 밟고 러닝머신 위를 달려야 한다. 틈만 나면 스쿼트와 런지를 아무 데서나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오메가 3, 비타민 D를 비롯한 각종 영양제를 꼼꼼히 챙겨 먹고, '생로병사'와 '명의'를 열심히 시청하여 전문의 수준의 지식을 쌓아야 한다. 어르신들의 대화의 상당 부분은 건강과 영양에 대한 것이다. 어디 병원의 어느 의사가 무슨 병을 제일 잘 본다는 것은 값이 오를 주식 종목처럼 아주 값진 정보다.
그렇게 오랫동안 해오던 습관(술, 담배)을 버린다는 것은 이제 '누가 누가 오래 사나?'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재미없어 안 하던 운동(헬스, 수영)을 시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년퇴직을 하고 이제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에서 완전히 벗어난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누가 누가 오래 사나? 경쟁에 뛰어든 꼴이다. 나 역시 혈압약, 비타민 D, 오메가 3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챙겨 먹고, 아침마다 체육관에서 2 시간 배드민턴을 땀내며 치고, 생로병사와 명의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하니 말이다. 아직 술과 담배는 끊지 못했다. 친구와 대화하며 마시는 술이 주는 스트레스 해소 효과와 담배가 주는 각성 효과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 다낭 호텔의 아침 뷔페식당에서 전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잎사귀와 파프리카로 샐러드를 담으며 나도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엄숙하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