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루손 섬의 북쪽 서해안에 비간이란 도시가 있다.
1572년에 스페인인들이 처음 세웠으며, 1999년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 필리핀에 몇 없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모습이 그대로 담긴 도시로도 꼽힌다. 실제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사유 중 하나로, 비간이 18세기 초 스페인의 식민 도시 계획을 그대로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라고 하는 점도 언급되고 있다. [나무위키]
1800년대 초 우리나라의 홍어장수 문순득이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오키나와를 거쳐 여송국이라 알려진 필리핀의 비간에서 9개월을 머물렀다. 마침내 마카오를 거쳐 중국을 통해 고향 우이도에 돌아왔는데, 그 당시 우이도에 유배되어 있던 실학자 정약전이 그의 저서에 '표해시말(漂海始末)'이란 제목으로 전 일정을 기록하였다. ( https://youtu.be/OyaOsTJkz5w?si=HuIGaD8UcJXZWRUU )
비간을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다.
비간 공항이 있기는 하나 경비행기나 소형전세기를 위한 공항이지 정기적인 항공편은 없다. 마닐라, 바기오, 클락에서 승용차나 버스로 이동해야 한다. 클락에서 300킬로가 넘는다. 구글맵으로는 자동차로 6시간 정도의 거리라고 한다. 버스로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여러 번 필리핀을 방문했지만 기회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필리핀에서 운전을 시도한 적 없다. 트라이시클과 오토바이가 많아서 내키지도 않지만 현지에 사는 지인들의 차에 동승하느라 꼭 해야 할 경우가 없었다.
한국에서 스카이스캐너 앱으로 렌터카를 예약했다. 좀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방랑길에 꼭 가볼 마음이었다. 그런데 묵고 있는 숙소 주인이 렌트비용을 듣더니 터무니 없다며 렌터카 취소하고 자기차를 빌려 가란다. 그러더니 필리핀에 28년을 살았지만 자기도 비간을 가본 적 없다며 같이 가겠단다. 숙소에 묵고 있는 다른 투숙객도 할 일 없다며 따라나선다. 그렇게 남자 셋이 길을 떠났다.
숙소 주인과 번갈아 운전을 했다. 비간과의 딱 중간에 로사리오란 마을이 있다. 거기까지는 왕복 4차선 고속도로다. 그 이후는 맥아더 하이웨이란 왕복 2차선 국도다. 운전하기 쉬운 고속도로는 필리핀 운전이 처음인 내가 하고, 계속 마을을 지나가야 하는 국도는 차주가 하면서 근 7 시간 걸려 비간에 도착했다. 오전 11시에 출발했더니 거의 일몰 시간에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
비간 구시가지에 호텔이 많다. 스탠더드 싱글룸 세 개가 예약 가능한 호텔을 부킹닷컴으로 검색하여 호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식민지 풍의 건물을 리노베이션 한 분위기 좋은 호텔이었다. 카운터의 여인에게 방 세 개의 가격을 물었다. 보통 이렇게 당일에 카운터를 찾으면 부킹닷컴보다 얼마라도 싸게 숙소를 얻을 수 있다. 최소한 부킹닷컴의 수수료를 물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직원이 제시하는 가격이 훨씬 비싸다. 부킹닷컴의 예약 직전의 화면을 보여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15% 할인해 주겠다며 가격을 다시 제시했는데 그 가격도 부킹닷컴보다 조금 비싸다. 결국 직원 앞에서 부킹닷컴으로 예약을 하고 키를 받았다. 이렇게 답답할 수가...
식민지 시대의 건물과 거리가 유네스코 문화유산답게 잘 보존되어 있다. 관광객 대부분은 필리핀 사람들이다. 우리 같은 동아시아인이나 서양인은 보기 힘들다. 아마도 정기 항공편이 없어 접근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방랑 중이고 예전부터 가보고 싶던 곳이라 만족스러웠는데, 동반자들은 볼 것 없다며 투덜거린다. 맥아더 하이웨이도 해안에서 좀 떨어져 바다를 보며 운전하는 소위 Scenic drive road 도 아니다. 근사한 술집도 없다. 결국 리오나 플로렌티노(Leona Florentino, 19세기 필리핀 여류 작가) 동상 옆의 그녀의 이름을 기리는 Leona 란 식당의 도로 위 테이블에서 비간의 밤을 맞았다.
이즈음 거의 혼자서 방랑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동행이 있다 보니 솔직히 영 불편하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야 하니까. 혼자 다니면 입이 좀 심심하지만 모든 결정을 내 직관으로 바로 하거나, 아니면 본능적으로 습관적으로 하면 된다. 그러나 동행이 있으니 숙소 선택부터 음식 종류 선택, 심지어 운전 중에 쉬는 것까지 다 협의(?)를 해야 한다. 심지어 그 둘이 나보다 필리핀 경험은 훨씬 많다. 심지어 숙소 주인은 필리핀 영주권자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 인생을 즐기는 방법도 다르다.
가치관이 모든 결정의 근거이자 기준이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가치관을 갖고 산다.
그래서 같이 살기가 힘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