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가는 길이다. 3박 4일의 아주 짧은(?) 방랑길이다. 아침에 여행 가방 싸면서 이렇게 준비해야 할 거면 좀 더 길게 갈걸 하고 후회했다.
공항 가는 운전은 큰 즐거움이다.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안에서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수백 번 들은 것 같은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김광석이 노래 부르던 시절에는 60대면 노인이다. 노인이 되면 그리 오래지 않아 죽는 것이 당연하다. 별로 아쉽거나 안타까울 것 없다. 갈 때가 되어 간 것이다. 그래서 노래 마지막에 쿨하게 '잘 가시게' 한다.
아사히카와는 홋카이도 제2의 도시다. 인구가 50만이 좀 넘는단다. 580만 명의 홋카이도 사람들 대부분은 삿포로 부근에 몰려 산다. 그래서 여행객들은 삿포로로 몰려든다. 붐비고 복잡한 곳은 아무리 좋아도 이제는 가고 싶지 않다. 아시아나가 유일하게 아사히카와 직항 편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았다. 그래서 마일리지 항공권을 끊었다. 그것도 비즈니스석으로.
아사히카와를 혼자서 왜 가냐고 딸이 물었다.(손주들 안 봐주고...)
예전부터 홋카이도에 가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왠지 거부감이 있는데 인구가 50만 밖에 안된다는 홋카이도 제2의 도시 아사히카와에 직항 편이 있다. 그리고 아시아나 항공 마일리지를 대한항공과 통합하기 전에 왠지 빨리 소진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일본에서와 같은 좌측통행 운전을 가끔은 해서 감각과 느낌을 잃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있다. 그리고 일본 음식은 언제나 환영이다.
타이라비 사이트에서 오릭스렌터카를 예약했다. 아사히카와 공항 렌터카 부스에 아무도 없다. 카운터에 놓인 전화기(?)를 들자 남자목소리가 나온다. 이름을 얘기하자 그 자리에서 5분만 기다리란다. 젊은 남자가 나타나 셔틀버스로 가까운 렌터카영업장으로 데려간다. 많은 렌터카 회사가 몰려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여행객들이 아사히카와 공항에서 차를 빌린다.
아사히다케는 홋카이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해발 2291미터다. 이틀을 아사히다케 정상이 보이는 산속 호스텔에 묵었다. 호스텔의 장점은 공용주방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음식은 해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난 원래 요리하는 것을 싫어한다. 요리가 싫은 것이 아니고 설거지하는 것이 싫다. 맛있게 잘 먹고 나서 설거지하는 것이 정말 싫다. 일대가 스키리조트 타운인데 비수기라 식당이 없다. 내가 묵고 있는 호스텔은 당연히 없고 근처 호텔에도 운영 중인 식당이 없단다. 유일한 식당이 가까운 로프웨이 타는 곳에 있는데, 점심시간에만 운영한단다. 오후 다섯 시경에 아무런 식사 준비 없이 호스텔 체크인을 했는데 근처에 음식이 없다니 난감하다. 결국 30분을 운전해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히가시카와의 편의점을 찾았다. 샐러드 두 가지와 다마고(일본식 계란말이)를 샀다. 물론 맥주 한 캔이랑.
호스텔에 온천탕이 있다. 심지어 노천탕도 있다. 시즌이 지난 비수기라 호스텔에 손님이라곤 두세 쌍 정도다. 그 온천탕을 혼자 이용했다. 온천탕 이용시간은 오후 3시부터 아침 10시까지다. 낮에는 청소하기 위해 잠시 닫는다. 밤에 노천탕에 누웠는데 하늘에서 별이 아닌 눈이 떨어진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은 아니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맞으며 실존의 엄숙함을 느꼈다. 살아 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기쁨이다.
아침에 로프웨이 정거장으로 갔다. 로프웨이는 우리가 익숙한 케이블카다. 곤돌라가 아니고. 케이블카가 1000미터에서 1600미터까지 올려다 준다. 4월 25일인데 첫 운행은 오전 9시다. 첫차에 10명 정도가 탔는데 스키나 스노보드가 없는 사람은 나 혼자다. 이런 상황일 줄 전혀 예상 못했다. 5월 중순까지도 스키를 탈 수 있단다. 케이블카가 제법 크다. 수용인원이 100명이다.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시간당 최대 300명을 1600미터까지 올릴 수 있다는 얘기다.
아사히다케는 활화산이다. 정상부에 움푹 들어간 골짜기에서 수증기가 무럭무럭 피어난다. 정상이 눈앞에 가까이 보인다. 맘먹고 오르면 두 시간 이내에 충분히 오르겠다. 그런데 발이 눈 속에 푹푹 빠진다. 눈신(?)이라도 있어야 갈 수 있다. 함께 오른 사람들은 스키나 스노보드를 타고 저 멀리 사라진다.
정상을 꼭 올라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내려올 산을 왜 오르냐는 사람들도 있다. 난 이도저도 아니다. 정상을 꼭 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아니고, 등산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도 아니다. 높은 곳에 올라야만 볼 수 있는 경치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해발 1600미터에서 주변 경치를 충분히 감상하고 이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로프웨이 운항이 중지되었다. 풍속이 14 m/s가 넘어서란다. 바람이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만약 잠잠해지지 않는다면... 20분 간격의 운행 중에 한 번 결행했다. 로프웨이 시작역에 내려오니 10:50이다. 이 동네 유일한 로프웨이 식당은 11시부터 운영한다고 표시되어 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어디를 갈지 망설였다. 방랑이다 보니 목적지가 없다. 구글맵의 근처 사진기 표시를 탐색했다. 사진을 찍을 만큼 전망이 좋은 곳이란 얘기다. 물의 교회를 구글맵에서 찾았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로 유명한 곳이다. 구글맵 내비에 목적지로 넣었더니 이상한 멘트가 나온다. 도착하면 영업시간 시작 전이란다. 상당히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단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물의 교회를 다시 살펴보니 동절기에는 저녁 8시 반부터 9시 반까지만 개방한다고 한다. 낮에는 예약된 행사를 위해 일반에 개방하지 않는단다.
미쿠니 고개 전망대, 비에이의 '청의 호수', 후라노의 로프웨이 등을 내비 찍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3박 동안 600 km 정도 헤맸으니 렌터카가 충분히 아깝지 않게 달렸다.
렌터카는 마쯔다 CX5. 2.5 가솔린 엔진에 상시사륜구동이다. 현대의 투싼이나 기아의 스포티지 크기다. 좌측통행에 맞춰진 자동차의 방향지시등 레버는 오른쪽에 있다. 왼쪽 레버는 와이퍼다. 깜빡이를 켜려다가 와이퍼를 작동시킨다. 그리고 우회전을 항상 크게 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회전하면서 반대차선으로 진입하여 황당한 상황을 맞는다.
운전을 하다 보니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광경이 있다. 하늘에서 내리 꽂힐 것 같은 빨간 화살표다. 도로를 따라 길 왼쪽에 빨간 화살표가 끝도 없이 보인다. 어쩌면 공중에 매달린 화살표다. 도로 오른쪽에는 화살표의 노란 꼭지만 보인다. 빨간 화살표의 뒷면이 노란 화살표 꼭지다. 노란 화살표의 몸통은 흰색이라 눈에 잘 안 띈다. 아마도 엄청 눈이 쌓여 도로의 경계가 구분 안될 때 제설차를 위한 도로 경계 안내라고 짐작한다. 이곳은 겨울에 엄청난 눈이 내리는 다설지역이다.
운전 중에 갑자기 며칠 전에 봤던 유튜브 내용이 생각났다. '나이 들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세 가지'란 것이었다. 자랑질과 지적질은 바로 생각나는데 나머지 하나가 영 떠오르질 않는다. 기억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며 운전하고 있다. 기억력과 암기력 하나는 수재 소리 듣고 컸는데 나이 드니 영 아니다. 며칠 전에 감명받은 내용을 이렇게 기억해내지 못하다니... 다른 생각을 못할 만큼 계속 나를 괴롭힐 것 같아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ChatGPT에 물었다. '나이 들면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세 가지가 뭐지?' 금세 답을 준다. 이호선 교수의 영상이고 간섭질이란다. 간섭질도 물론 그럴 듯 하지만 아니다. AI도 딴소리한다. 절대 간섭질은 아니다. 결국 AI가 찾아준 유튜브 영상을 재생했다. '이간질'이었다. 이제 속이 후련하다. 이간질은 남 뒤통수치는 것이다. 자리에 없는 사람 얘기는 아예 안 하는 것이 답이다.
마지막 밤은 아사히카와 중심가 호텔에 묵었다. 저녁을 근처 식당에서 스시와 사케로 배를 채우고 호텔 지하의 온천탕을 찾았다. 상쾌한 몸이 은근 마음을 들뜨게 하는데 이제 겨우 9시가 조금 넘었다. 도저히 그냥 잘 수가 없다. 호텔 14층에 바가 있다. 바에서 보는 야경은 그저 그렇다. 인구 50만 도시의 야경이 별것 있겠냐 싶다. 바의 한쪽 구석진 자리를 안내받았다. 큰 평면 모니터에 근사한 야경이 고정되어 있다. 도쿄타워가 보인다. 수면에 물결치는 모습과 건물의 조명이 수면에 반사되어 몽환적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저기를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어 AI에 물으니 도쿄 월섬 부근이라고 한다. 새로운 목적지가 하나 생겼다.
바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 호텔 전체가 금연구역이고 1층 로비 옆에 흡연실이 하나 설치되어 있는데, 14층 바와 1층 이자카야는 실내에서 흡연이 가능하다. 아직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술집에서의 흡연에 관대하단 생각이 든다. 간접흡연에 너그럽거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바텐더가 우아함을 내뿜고 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겁다.
이번 방랑을 우아하게 끝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