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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물었다.

Death is a day worth living

by 재거니

고속도로 휴게소다. 간식거리가 넘쳐나는 휴게소를 둘러보다가 어울리지 않게 책이 전시되어 있는 가판대에 눈길이 갔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책들을 살펴본다. 이런 장소에서 좋은 만남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


‘죽음이 물었다’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느냐고.


도발적인 질문이다. ‘Death is a day worth living’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어쩌면 원래의 영문 제목인지도 모르겠다. 영어 문장을 해석하려고 곰곰이 생각했다.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없는데 영 해석이 떠오르지 않는다. 죽음이 살 가치가 있는 날이라니...


책을 집어 들고 표지를 넘겨 저자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브라질의 완화의료 의사가 많은 죽음을 보며 느낀 것을 쓴 책이란다. 완화의료가 무엇인지 안다. 마지막 고통을 완화시켜 주기 위해 모르핀을 비롯한 온갖 처방을 내리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완화의료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과 관련된 문제에 직면한 환자와 그 가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접근으로, 조기 진단과 정확한 평가, 그리고 통증과 기타 신체적, 심리사회적, 영적 문제의 치료를 통해 고통을 미연에 방지하고 경감시킨다.(세계보건기구의 정의)


저자가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 건강한 우리가 왜 죽음에 대해서 알아야 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을 때 알려줘도 되잖아? 철학자나 종교인도 아니면서 의사가 굳이 죽음까지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추천사에 있는 내용이다. 추천사를 쓴 호스피스 병동 센터장인 의사에게 의사인 아들이 한 소리다. 아들은 살리는 의사가 되고 싶다며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었단다. 아차 싶었다. 당연히 저자가 남자라고 생각했다. 브라질 의사인 저자의 이름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도 성별을 생각하지 못했다. 저자도 여자고 추천사를 쓴 한국의사도 여자다. 완화의료는 마지막 돌봄이다. 돌봄은 수컷보다는 여자가 어울린다. 성차별이지만 현실에서도 많은 딸들이 아들보다 돌봄을 잘한다.


주변에 의사가 없음에도 저자가 의사가 된 것은 어릴 때 외할머니의 고통스러운 노후를 보면서 컸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재택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셨다. 왕진온 의사를 보면서 의사의 역할에 대한 동경이 결국 그녀를 의사로 이끌었다.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저자 자신. 3대에 걸친 일종의 레거시가 느껴진다. 딸을 그렇게 낳고 싶다던 내 딸이 언급한 레거시!!( https://brunch.co.kr/@jkyoon/424 )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처럼 사는 삶을 택하지만 모두가 살아 있는 상태로 죽을 권리를 갖고 있다. 내 차례가 오면, 나는 멋지게 삶을 마감하고 싶다. 그날, 나는 살아 있고 싶다.


사람들은 이유가 존재하는 한 어떤 방식이든 견뎌낼 수 있다.(니체가 한 말이란다. 그 어려운 니체가 이런 쉬운 말도 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일에 대한 헌신은 사회적 인정, 왜곡된 방식으로 스스로를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는 것, 자신이 있어야만 세상이 돌아간다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믿게끔 만들고 싶어 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사람들은 결국 살아온 대로 죽는다.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면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가질 가망도 없다.


인간의 삶에서 죽음의 과정만큼 강렬한 체험은 아마 탄생뿐일 것이며,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죽음의 순간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https://brunch.co.kr/@jkyoon/206 )


예전에 병원에 구직면접을 보러 갔다가 이런 일이 있었다. 면접관들이 나의 교육과정과 경력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고 나서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질문하라고 했다. "제가 이곳에서 일하기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내 대답에 면접관이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좀 더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왜 여기서 일하고 있습니까? 왜 하루의 여덟 시간을 이곳에 투자하고 있습니까? 왜 인생의 3분의 1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습니까?" 나는 몇 주 후에 그 면접관이 사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구직면접을 본다면 똑같이 묻고 싶다. 정년퇴직하고 일할 마음 없으니 면접볼 일이 없겠다. 다음 생에 꼭 써먹어야지!!!)


마지막 인상이 가장 오래간다. 상실에 임하여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나중에 남길 인상을 결정한다.( https://brunch.co.kr/@jkyoon/822 )


병에 걸리면 시간에 대한 인식이 건강했을 때와 확연히 달라진다. 기다리는 시간들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다. 중략 가장 힘든 일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한 어머니가 죽어가는 자식에게 "이제 가도 돼"라고 말하는 것을 도덕적 행위의 단적인 예로 본다. 처음에는 자식의 병이 낫기를 기도했겠지만, 다음에는 그 힘과 연결되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최선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식을 위한 최선의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줄지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자식을 놓아주는 것이다.


날이 저물기를, 주말을, 휴일을, 은퇴를 기다리며 삶을 보낸다면 죽음의 날이 더 빨리 오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하기를 피하는 사람들은 가구 없는 방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는 죽음의 날이 올 때까지 인간이 되기 위해 저마다 자신을 체계화하고, 발견하고, 실현해야 한다.


'캐러비안의 해적'이라는 영화를 보면, 길을 잃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한 멋진 대사가 나온다. "발견될 수 없는 곳을 발견하기 위해선 먼저 길을 잃어야 하지. 그게 아니라면 세상 사람들이 다 그곳을 알겠지."(내가 방랑을 떠나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싶어 하는 이들의 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많은 이들이 아무런 즐거움도, 기쁨도 없이 그저 의무적으로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낸다.(서귀포에 사는 아들이 떠오른다.)


평생 자유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그래서 초코바 이름이 자유시간이구나.)


결국 남는 건 마지막 인상이지 첫인상이 아니다. 당신은 평생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경이로운 이에게 반해 결혼에 이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배우자에게 실망한다. 당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 괴물로 변한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그의 마지막 인상이다.


말기 돌봄과 의료적 개입의 제한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건강하게 잘 살고 있을 때 이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병에 걸리면 이런 종류의 대화는 꼭 필요한 것이긴 해도 훨씬 민감한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사전연명의료의향서 얘기다.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은 이미 작성했다.)


인생을 살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았는지'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이다. 삶의 끝에 이른 사람들을 돌보면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다행이다. 난 이미 답을 갖고 있으니...)



제목이 도발적이라 눈길이 갔지만, 굳이 구매해 읽은 이유는 정가가 17,000원인데 10,000원에 판매하고 있어서였다. 7,000원 버는 것 같아. 그렇지만 읽는 내내 즐거웠다. 즐거움은 우연찮게 찾아오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 '죽음과 죽어감'과 데릭 도일의 책 '플랫폼 티켓'을 구해 읽어야겠다.

읽을 책이 있다는 것은 어르신이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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