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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배우는 시간

죽음 비즈니스?

by 재거니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일어나는 최대의 사건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일생일대의 사건에 대해 새 자동차를 구입할 때보다도 준비를 덜 한다.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법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병원에서도 알려주지 않는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로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현대의료는 죽음에 대한 정의마저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눈감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지만, 그런 행운은 극소수에게만 주어진다. 죽음의 일상성을 인식하고 죽음의 각 단계에 무엇을 알고 행해야 하는지 꼼꼼히 준비하지 않으면 위급한 상황에 닥쳐서는 병원에 생사결정권을 넘길 수밖에 없다. 의료기술이 발달하며 의학이 죽음을 더욱 외면하는 역설적인 시대에 살게 된 우리가 알아야 할 노화와 죽음, 그리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법까지 ‘죽음 공부’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죽음을 배우는 시간 제일 뒤 표지에서]


한 의사가 수많은 죽음을 보며 느낀 것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누가 신문에 칼럼을 쓴 것을 우연히 읽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90861.html ) 성북구립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이틀 만에 읽어버렸다. 그리고 교보문고에 책을 주문했다. 두 번 읽고, 세 번 읽어 저자의 생각을 외우려고...(그런데 절판이라네!)


새 차를 구입할 때 많은 정보를 찾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도 보며 많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어렵게 결정을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아예 회피를 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오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살다가 시간이 흘러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게 된다. 우왕좌왕 허둥지둥 죽음을 맞는다. 준비를 본인이 해야 한다. 본인의 죽음이니...


죽음에 이르는 3단계

1. 혼자 외출을 하지 못하게 된다. 자식들이나 간병인의 도움으로 가벼운 외출(병원이나 음식점)은 한다. 걷는 것이 자신이 없다. 넘어질까 봐. 걸음걸이가 달라지는 것이 전조증상이다.

2.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집에서 화장실은 간신히 혼자 갈 수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지낸다. 식사를 위해 일어나 앉을 수는 있다. 그러다가 화장실조차 혼자 갈 수 없는 상황이 온다. 인간의 존엄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대소변 처리를 도움 받아야 하니까.

3. 음식을 삼킬 수가 없다. 먹고 싶은 것도 없다. 위로 넘어가야 하는 음식이 자꾸 기도로 넘어가 사래가 들린다. 폐로 들어간 음식 때문에 흡인성 폐렴이 생긴다. 레빈튜브(콧줄)를 끼우고, 심해지면 위루관 시술을 하게 된다.


각 단계마다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배우자나 자식이 어떻게 해주리라 기대하면 안 된다. 나 자신이 정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엄청난 부담을 갖고, 심지어 죄책감을 느끼며 결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담감이나 죄책감을 느끼기를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구급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면 모든 결정을 의사에게 맡겨야 한다. 의사가 나쁜 사람이 아니지만 의사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고, 심지어 소송에 대한 부담까지 느끼며 의사들은 최선을 다한다. 그렇지만 의사들의 최선이 환자 본인에게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인공호흡기를 달거나 에크모를 장착하는 것은 쉽게 결정되지만(비용 부담의 문제는 있다), 그것을 제거하는 결정은 누구도 쉽지 않다. 즉 달기 시작하면 아무도 뗄 수가 없다.


병원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심장이 멈추면(뛸 만큼 충분히 뛰었다), 심폐소생술은 병원에서 자동적으로 시작된다. 노쇠한 환자의 멈춘 심장을 마사지하면 갈비뼈가 다 부러지고 입에서 피를 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심폐소생술 성공 확률은 아주 낮다. 오히려 안 하는 것이 답인데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https://brunch.co.kr/@jkyoon/210 )는 최소한의 준비다.(2018년 10월에 했네)

아직 작성하지 않았다면 죽음에 대한 준비를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4년 전에 아흔넷을 몇 달 남기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10년 정도 혼자 외출을 하지 못하셨다. 아들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기적인 병원나들이를 함께 하고, 일주일에 한 번 밖에서 식사하는 것이었다. 식사를 하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겠니? 먹고 갈 수 있는 약 좀 구해주라."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 자살을 도와주는 것도 범죄란 것을 모르세요? 아들을 범죄자로 만들고 싶으신 것이에요?"

약을 구해달라는 것을 '나 좀 어떻게 해줘.'로 내게 들렸다. 그렇지만 해드릴 것이 없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건강할 때 해야 한다.


스위스로 조력자살을 하러 가기 위해서도 열 몇 시간 비행기 탈 기력이 남아 있어야 한다.

아니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전망 좋은 요양원을 찜해 두고 있어야 한다.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은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해야 한다.

누구한테? 미래의 사망선고할 의사에게...

어떻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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