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거니 Jul 05. 2022

딸이 딸을 낳았다.


딸이 딸을 낳았다.


두 번째 출산이다. 3년 반 전에 첫 출산으로 아들을 얻고, 온 집안이 매달려 아들 도민이를 돌봤다. 결코 지속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지구에 또 한 명의 호모 사피엔스를 추가하는 것이 난 아니라고 생각했다. 딸은 일하면서 애를 키우기 너무 힘들어해 더 이상 출산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둘째는 딸이라면 좋겠다란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설마 또 낳을까 했다. 둘째가 아들이라면 셋째를 낳아서라도 딸을 갖고 싶단 소리는 농담이려니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터울이 4년을 넘기면 안 된다며 결국 둘째를 임신했다.


아들일까? 딸일까?

결국 딸이란 소리를 듣고 아주 기뻐하는 딸이 나는 신기했다.

왜 그렇게 딸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일까?


2022년 6월 22일 딸을 낳고 조리원에 있는 딸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행복하니? 왜 그렇게 딸을 갖고 싶었던 거야? 난 도민이 키우기도 힘들어 더 안 낳을 줄 알았는데, 결국 딸을 갖고 싶단 마음 때문에 또 낳은 거잖아?"

"응 행복해. 뽀랑이(태명)를 보면 엄마와 내가 갖는 연대감을 나도 뽀랑이와 갖게 될 것이란 생각에 너무 이쁘고 좋아."

"연대감이라니?"

"아빤 모를 거야. 남자니까. 외할머니와 엄마의 연대, 엄마와 나의 연대, 그리고 나와 뽀랑이의 미래의 연대. 일종의 레가시(Legacy)지."


레가시가 뭐지? 과거의 유산이다. 대를 넘어 넘겨주는 것이다. 모계를 통해서만 전해 내려온 연대와 공감인가? 엄마와 딸 만이 공유하는 어떤 것? 가부장 사회 속에서 나고 자란 나는 이해하기 힘든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다시 찾아 읽었다.


남성과 여성, 남자와 여자.


남성과 여성은 자궁이나 고환을 갖고 있느냐에 따른 생물학적인 분류다. 남자와 여자는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느냐에 따른 사회적인 분류다.


농업혁명 이후부터 대부분의 인간사회는 남자를 여자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부계사회였다. -중략-  남자가 되는 편이 언제나 더 나았다. -중략- 남성적이라고 평가받는 속성들은 여성적이라고 평가받는 속성에 비해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여자다움의 이상을 구현한 구성원은 남자다움의 이상을 구현한 구성원에 비해 얻는 것이 더 적다. 여성의 건강에 투자되는 자원은 더 적고, 여성은 경제적 기회도 정치권력도 이동의 자유도 더 적게 지닌다. 젠더는 이상한 경주와 같아서, 어떤 주자들은 아무리 경쟁해봐야 겨우 동메달만 딸 수 있다.

                           - 유벌 하라리의 '사피엔스' -


많은 어머니들이 그래서 아들을 선호했다.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은 아들을 갖기 위해 많은 여아들이 유기되고 살해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많은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했다. 투표권이나 참정권이 없었고, 교육을 받을 권리나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 같은 것이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수천 년간 유지되던 가부장 사회가 거의 붕괴 직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미 붕괴했다면 페미니즘 운동이란 것이 사라졌겠지. 많은 여성들이 동의하지 않지만 우선 여성의 권리가 크게 신장되었다. 그다음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아동의 권리가 크게 변화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심지어 동물의 권리 역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가부장 사회 속에서 나고 자란 나 같은 남자 어르신들은 이렇게 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결국 성질 고약한 노인네로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 확실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학 동기 모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