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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 golf in Kyrgizstan

여름 설산 그 자체가 낭만이다.

by 재거니

비슈케크 도착 2일째다. 5시에 잠이 깼다. 아직 일출 전이라지만 창문을 통하여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보인다. 트레킹 하기 완벽한 날씨다. 비슈케크 근교의 알라 아르차 국립공원은 유명한 곳이다. 키르기스스탄을 여행한다는 사람은 누구나 가야 하는 곳이다. 하얗게 눈 덮인 봉우리들과 빙하 녹은 물이 세차게 흐르는 넓은 계곡을 갖고 있다. 비슈케크 도심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트레킹 시작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 당일 코스로 무리 없는 트레킹을 할 수 있다. 호스텔 리셉션 데스크에서 신청을 받아 택시를 준비해 준다. 왕복택시 대절에 5000 솜(한화 8만 원 정도)인데 서너 명이 나눠 부담하면 된다. 작년에 얀덱스고 택시로 혼자 가본 적 있지만, 오늘 특별한 계획이 없어 신청해 두었다. 그렇지만 어제 저녁에도 신청자가 나 혼자뿐이었다. 혼자 부담하고는 안 가겠다고 말해두었다.


설산을 보며 골프를 치면 어떨까?


키르기스스탄에는 18홀 정규골프장은 없다. 작년에 이미 조사 끝냈다. 비슈케크 시내에서 20여 키로 떨어진 곳에 'Maple leaf golf and country club'이 있다. 9홀 코스이고 결혼식 같은 행사가 열려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키르기스스탄에서 단 한 번이라도 골프를 칠 마음이 있었다면, 골프채를 제외한 소소한 준비(골프공, 티, 장갑, 거리측정기)는 해왔을 것이다. 배낭이 무거워진다. 그래서 애초에 마음먹지 않았다.


날씨는 너무 맑은데, 알라 아르차 국립공원 데이 트립은 취소되었으니 '꿩 대신 닭이라고.'


7부 등산복 바지에 가벼운 등산화 차림으로 숙소를 나섰다. 얀덱스고 택시가 시내를 가로지른다. 정남향으로 난 도로에서는 도로 끝에 설산이 걸려 있다. 여름에도 설산을 매일 보며 사는 키르기스스탄 사람들도 설산에서 낭만을 느낄까? 난 설산을 보면 가슴 저 밑에서 슬그머니 올라오는 야릇한 기분이 아직도 있다. 설렘 비슷한...


40여분 걸린 것 같다. 골프장 주차장이 만차다. 토요일이라서 그런가? '사람 많아 못 치겠네...' 골프장 페어웨이에 큰 공연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오늘 무슨 큰 행사가 있나? 야외 음향시설을 테스트하는 소리도 들린다. 클럽하우스에 들어가니 골프숍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고, 식당에서 주인 같은 남녀가 식사 중이다. 내 행색이 골프 치러 온 사람 같지는 않다. 키르기스인은 예니세이강 주변에 살던 몽골인종이라 어떤 사람은 한국인과 구별이 쉽지 않다. 식사 중이던 중년의 키르기스 여인이 내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한다. 너무나 확실한 한국말 발음이라 당황하여 한국말로 물었다.


오늘 골프 칠 수 있냐고?


못 알아듣는 표정이다. 내가 착각한 것이다. 그녀가 매니저인데 비슈케크에 사는 한국인이 자주 와서 골프 치기 때문에 그녀가 한국사람을 잘 알아볼 뿐이다. 내 이름이 '윤'이라고 하자 여기 오는 한국사람 중에 '윤'이 셋이나 있다고 한다. 내일 야외 콘서트가 골프장에서 열린단다. 오늘은 무대준비와 리허설로 골프장이 오후 2시까지만 플레이할 수 있단다. 지금 오전 10시니 시간은 충분하다. 9홀을 두 번 돌아 18홀 라운딩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럴 마음은 없다.


9홀 주말그린피, 골프채 렌털, 수동 카트, 골프공 다섯 개의 가격을 모두 합하니 5,050 솜이란다. 캐디는 있냐고 내가 물었다. 거리측정기가 없으니 핀까지의 거리를 알려줄 캐디가 필요하다. 캐디피는 9홀에 500 솜이란다.


비슈케크 시내보다 조금 더 가깝게 설산을 보며 그렇게 골프 라운딩을 시작했다.


골프장이 완전 평지라 수동카트를 끌면서 라운딩 하는데 전혀 문제없다. 페어웨이 잔디 상태는 양호(?)한 편이고 그린 상태는 아주 두꺼운 양탄자(?) 같다. '아미르'라는 이름을 가진 캐디는 진품일 리 없는 프라다 백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소년이다. 'How old are you?'를 알아듣지 못하여 번역기를 돌려 나이를 물으니 14살 이란다. 한 달 지나면 15살이고. 14살이란 숫자조차 영어로 말하지 못하는 소년에게 핀까지의 거리를 묻겠다고 했으니...


한창 멋 부릴 나이인 아미르는 골프백을 얹은 수동카트를 끌고 나를 따라다닐 뿐이다. 주인과 하인처럼.


첫 티샷도 나쁘지 않았다. 처음 라운딩하는 골프장이고, 내 것 보다 훨씬 무겁고 투박한 골프채로 정말 살살 쳤다. 큰 욕심부리지 않고, 큰 기대 하지 않고, 핀까지의 거리조차 눈대중으로 짐작하며 오로지 공을 클럽면 중심에 맞추는 것에만 집중하였다. 스코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키르기스스탄에 하나밖에 없는 골프장에서 설산을 보며 라운딩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실존의 엄숙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설산을 향해 공을 날렸다. 기대보다 예상보다 공은 잘 떴다. 하얀 공이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무거운 골프채에 공이 맞는 순간, 무게중심에 제대로 맞으면 손에 가볍고 묵직한 타격감을 느낄 수 있다. 그 감촉이 좋아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골프를 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6번 아이언을 페어웨이에서 세컨샷으로 그린에 올려 심지어 파도 했다. 뿌듯한 순간이다.


골프 격언 중에 그런 말 있다. 50대 골퍼가 되면 5번 아이언을 페어웨이에서 조차 휘두르는 것을 포기하고, 60대 골퍼는 6번 아이언을, 70대 골퍼는 7번 아이언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즉 나이 들수록 길고 무거운 롱아이언이 힘에 부치는데, 나이대와 포기하는 아이언 번호의 상관관계가 있다. 공을 다섯 개나 샀는데 9홀 라운딩 하는 중에 한 개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한 개만 사도 될뻔...


토요일인데도 골퍼는 많지 않았다. 9번 마지막 홀에 와서야 앞 팀 세 명의 그린플레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난 혼자라 무척 빠르게 진행했는데도. 한 시간 반 만에 9홀 플레이가 끝났다. 보통은 캐디피에 추가로 약간의 캐디팁을 얹어주는데, 아미르에게는 도저히 팁을 줄 수가 없었다. 팁을 안 주겠다고 굳게 마음먹으면서도 마음 한쪽 구석 어딘가에 불편함이 남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p.s.: 2026년에 이식쿨 호수 주변에 9홀 골프장이 개장을 준비 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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