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르토 리오 트란퀼로
새벽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바람소리에 잠이 깼다. 어제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잠들었다. 오늘 아침 8시부터 'Marble cave' 카약을 타기로 예정되어 있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다. 이미 충분히 훤하다. 이렇게 바람이 불면 호수에도 파도가 칠 텐데 카약을 탈 수는 있는 것인가 걱정된다. 어제 정오가 조금 지나 Puerto Rio Tranquilo에 도착했다. 식당과 여행사를 겸하고 있는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시간 있으니 오후에 관광할 수 있냐고 물었다. 바람 때문에 배를 띄우지 못한단다.
코이아이케에서 버스를 타고 소위 'Carretera Austral'의 Ruta 7을 따라 4시간 반을 달려 푸에르토 (리오) 트란퀼로에 도착했다. 총길이 217km 중에 100km 정도만이 포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린 것이다. 예상대로 안데스의 경치는 숨 막힐 지경이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Villa Cerro Castilllo' 부근이 특히 좋았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오토바이족들을 제법 자주 본다. 경치가 아름답다고 소문난 카레테라 아우스탈을 달려보는 것이 로망일 것이다. 간혹 자전거 양쪽에 엄청난 짐을 매달고 가는 사람도 보인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은 무척 힘들 텐데, 그리고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만드는 엄청난 먼지를 꼼짝없이 다 맞아야 할 텐데. 고행에 가까운 아니 고행이 틀림없는 자전거 타기를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속죄하고 있는 것일까?
잠을 6시간 이상 충분히 잤는데 버스에서 자꾸 잠이 온다. 이상하다. 코이아이케의 해발고도가 250미터 정도다. 그런데 이 구간에 해발 1100미터의 고개를 넘는다. 갑자기 1000미터의 고도를 올리면 대기압의 12% 정도가 감소한다. 가장 가벼운 고산증상인 졸음이 밀려오는 것이다.
부킹닷컴에는 푸에르토 트란퀼로에 숙소가 없다고 했다. 잘 곳을 정하지 않고 간다는 것은 노숙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이 나이에 노숙할 마음은 1도 없다. 구글맵에서 푸에르토 트란퀼로를 탐색했다. 어느 여행사가 숙소와 식당도 겸하고 있다는 리뷰가 있다. 왓츠앱으로 여행사에 내 상황을 전했다. 3박을 머물면서 카약을 타고 싶다고. 가능하다며 가격표를 보내왔다. 숙소 가격이 좀 비싼 듯 하지만 부킹닷컴에 나오지 않는 숙소라도 잡고 갈 수밖에.
숙소의 아침식사가 8시부터라는데 카약을 타기 위한 숙소 출발도 8시다. 숙소 바로 앞에 이 마을의 유일한 주유소가 있다. 주유소에 딸린 'PRONTO Express'가 24시간 운영한다. 커피 한잔과 도넛 두 개로 아침을 해결했다. 그렇지만 바람이 심상치 않다. 이슬비처럼 빗방울이 날리기도 한다. 날씨예보는 오늘내일 모두 구름과 계속되는 비다. 어제 낮에는 오늘 오전에는 비 없다고 했었는데... 운 없으면 3박이나 하면서 대리석 동굴에 가보지도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항상 운이 좋을 수 있겠냐?'
카약킹은 자동차로 15분 정도 이동하여 장구를 갖추고, 1인이나 2인용 카약을 타고 동굴 근처를 배회하는 것이다. 전체 카약킹 거리가 1km 이상이라고 했다. 카약은 다리를 펴고 앉는 자세로 탄다. 등받침대가 있으면 다행이지만 없는 경우도 있다. 등받침 없는 카약을 타본 적 있다. 너무 허리가 아파 고생스럽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지만 카약킹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대리석 동굴의 생성이 물에 의한 것이라 가장 생생한 접근은 카약을 타야 볼 수 있다. '핸드폰으로 사진 찍다가 호수에 빠뜨리면 어떡하지 구명조끼도 입었겠다. 얼른 물속으로 들어가 건져야 할까?'
바닷속의 쌓인 석회암이 지각작용에 의해 수억 년 전에 대리석으로 변하고 융기했다. 빙하 녹은 물이 만든 호수가 생기고, 물과 비바람에 만년 이상 침식되어 지금의 경이하고 환상(?)적인 모습이 만들어졌다. 그 모습에 현생 인류가 반하여 흥분하는 것이다. 엄청난 영상이 구글맵과 유튜브에 쌓여 있다.
General Carrera Lake는 매우 큰 호수다. 호수 가운데를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선이 지나간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안데스산맥의 대륙분수령(Continental Divide)을 국경으로 정했다. 대륙분수령은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결국 어디로(태평양 아니면 대서양) 흘러갈지를 가르는 선이다. 호수가 안데스산맥을 절단 냈다.
결국 카약킹은 날씨 때문에 취소되었다. 식당에서 자주 끊기는 인터넷에 짜증 내며 시간을 보내는데, 숙소 안주인 패트리샤가 묻는다. 오후에 카약은 안되지만 배 타고 가까이 가는 것은 가능하단다. 그거라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당연히 해야지!' 판초와 구명조끼를 입고 사람들과 함께 선착장으로 갔다. 부모님을 모시고 온 여섯 명의 가족과 할머니를 모시고 온 아들과 손자 그리고 내가 보트의 탑승객이다.
호숫가의 커다란 바위에 크고 작은 동굴들이 잔뜩 모여 있다. 제법 큰 동굴 안으로 배를 밀어 넣고 사진을 찍는다. 배를 운전하는 카를로스와 설명을 하고 사진을 찍어주는 가이드 카를로스가 바쁘다. 할머니가 아들과 손자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으며 'V'자를 수줍게 만든다. 할머니가 너무 귀여워(?) 나는 미소가 저절로...
관광을 끝내고 이제 선착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제일 나이 많아 보이던 할머니를 배의 제일 뒷자리로 옮긴다. 목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사람들을 가능한 배의 뒤쪽에 앉게 하고 보트는 냅다 달리기 시작한다. 스피드보트인양. 1미터 가까운 파도를 가로지르며 배가 텅텅거린다. 아마도 그 충격을 제일 덜 받는 자리가 뒷자리라 할머니를 특별히 뒤로 옮긴 것이다. 할머니 허리가 작살나지 않도록..
빗방울과 배가 달리며 만드는 물방울이 세차게 얼굴을 때린다. 눈을 뜰 수가 없다. 아랫도리 내복을 입었건만 춥다. 눈도 뜨지 못하고 텅텅거리며 달리는 시간은 거의 20분 정도였다. 드디어 보트에서 내렸다. 이제 끝났다. 두 밤을 더 자야 하는데 뭐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