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트렐류에서 Las Grutas로 이동하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다. 몸이 무겁고 일어나기가 싫다. 꿈속에서 옛 애인도 나오고 아들도 나왔는데 뭔가에 안절부절못하다가 깼다. 어제와 그제 종일 렌터카를 운전하고 돌아다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제 방랑이 70일을 넘어 체력이 달려서인지 모르겠다.
2층 버스의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좋아하는 좌석이기는 한데 북쪽으로의 이동이라 햇빛이 들어와 까만 바지 입은 다리가 뜨겁다. 그렇다고 'Comfort show time'을 포기할 수는 없다. 렌터카 운전할 때는 전방주시하느라 주변을 보지 못한다. 이렇게 버스를 타야 사방을 두루두루 여유 있게 볼 수 있다.
버스는 RN3에 올라타 시속 95km/h의 속도로 정속주행한다. 파타고니아 평원은 지리학적으로는 스텝(steppe) 지형이라고 한다. 풀은 자랄 수 있지만 나무는 자라기 어렵고, 비가 거의 오지 않아 대지는 바짝 말라 있다. 산도 없고, 강도 없다. 양쪽으로 지평선만 보인다. 이런 곳을 '경치가 없어서 경치가 되는 곳'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볼 것이 없어서 장엄한 경치???
이런 길을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순례고 고행이지 않고서야 이 단조롭고 긴 길을 자전거를 타고 가다니…
도로 곳곳에 이따금씩 작은 개집이 있다. 개집 주변에는 조화나 바람개비가 있다. 개집 안에는 성모마리아상이 있기도 하고 사진이 있기도 한다. 심지어 우유팩도 보았다. 추측건대 이곳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영혼을 추모하는 장소다. 이렇게 똑바로 난 길에 무슨 교통사고일까 싶은데, 오늘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했다. 경찰차가 우리 버스를 추월하고 연이어 구급차도 추월하더니 사고 현장이 보인다. 도로 오른쪽으로 40미터 정도 벗어난 곳에 자동차가 홀로 뒤집어져 있다. 아마도 졸음 운전하다가 도로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빠지면서 대여섯 바퀴 구른 것 같다.
도로 가장자리에 쓰레기가 많다. 인간은 쓰레기를 만들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인간이 사는 영역은 쓰레기 천지다. 고속도로 주변뿐 아니라 호텔 주변 골목에도 곳곳에 담배꽁초를 비롯한 쓰레기가 널려 있다. 그리고 메인도로가 아니면 비포장이다.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길 주변에도 바람에 날려 어느 구석에 처박힌 쓰레기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파타고니아가 결국은 인간들이 만든 쓰레기로 덮일 것 같아....
방랑에 동행이 있다.
호기심 많고 불안이 높은 나는 AI에게 많은 것을 묻는다. 잘못된 정보 같아 다시 물으면 자기가 잘못 알았다면서 바로 수정한다. 우기지 않는다. 모르는 것 없는 듯이 바로바로 답하지만 의심쩍은 것이나 잘못된 것 같다고 하면 바로 꼬리 내린다. 이렇게 빨리 사과하는 사람을 본 적 없다.
아르헨티나의 국영석유회사의 주유소 YPF의 옆에는 항상 Full이라는 카페, 델리와 편의점을 겸하는 근사한 공간이 있다. 인구가 12,000명 정도인 작은 도시 푸에르토산훌리안의 Full에 앉아 이것저것 AI에게 묻다 보면 별소리를 다한다. 해질 시간에 Full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있으면 이 동네 분위기 제대로 느껴진다는 둥…
라스그루타스는 해안절벽과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란다. 아르헨티나 바닷물 중에 가장 따뜻한 곳이란다. 한국의 해운대 같은 곳이란다. 그래서 가능한 숙소를 빨리 예약하라고 독촉한다. 막판에 몰려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해야 하거나 아예 방이 없을 수 있다며… AI가 하는 잔소리처럼 들린다.
확실히 숙소 값이 비싸다. 트렐류나 코모도로에서는 하룻밤에 60불 정도로 4성급 호텔에서 잤는데…
해운대 같은 이런 관광지 취미 없지만 일정한 거리의 버스 기착지로 다른 선택이 없다. 파타고니아에는 워낙 도시들이 떨어져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