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죽어야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철학을 바이아블랑카 공항 게이트 앞에서 유튜브로 보고 있다. 난 항상 공항에 일찍 간다. 가도 너무 일찍 간다. 공항이란 공간이 나를 무척 편안하게 한다. 공항 청사의 넓고 높은 공간이 주는 쾌적함 속에서 새로운 비행에 대한 설렘과 함께 무엇엔가 집중할 수 있다. 신이 모든 것을 정해놓은 세상에서 살던 인간은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습관적으로 살 수 있다.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는 최소다. 그렇지만 도덕과 관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신이 죽어야 인간은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니체가 이렇게 쉬웠나???
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존재인가?
바이아블랑카 공항은 도심에서 8km 정도 떨어져 있다. 하루에 내리고 뜨는 비행 편이 3편이나 될까? 탑승교가 딱 하나 있는 작은 공항이다. 주차장에는 자동차가 가득 차 있지만 청사 안은 아직 썰렁하다. 이런 공항이 좋다.
체크인 카운터가 여섯 개 있다. 아르헨티나항공이 3개의 카운터를 사용하고 있고, LADE 표시가 있는 카운터가 하나 다. LADE 카운터로 다가가 스마트폰의 보딩패스를 남자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혼자 컴퓨터를 보고 있던 남자 직원이 두 시간 전에 오픈한다고 스페인어로 얘기한다. 스페인어를 전혀 몰라도 나는 알아 들었다.
카페의 그림 메뉴판에서 커피와 팬케이크를 주문했다. 너무 단 시럽을 떡칠한 팬케이크를 반쯤 먹었을까, LADE의 아까 그 직원이 다가와 카운터가 열렸고 식사 천천히 하고 와도 된다고 스페인어로 얘기한다. 스페인어를 전혀 몰라도 나는 다 알아들었다. LADE의 카운터로 다가가 여권을 내밀자 앉아 있던 젊은 여직원이 약간 놀라는 표정이다. 동양 노인네가 LADE를 탄다는 것이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아르헨티나에 아주 익숙한 찐 여행자가 아니라면 LADE를 알 수가 없다. 괜히 으쓱해진다. 찐 파타고니아의 방랑자가 된듯하여...
게이트 앞에 많던 사람들이 탑승교를 통하여 아르헨티나 항공을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버렸다.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다. 바릴로체에서 온 LADE의 비행기가 탑승교가 아닌 장소에 주기되어 있다. 언제 착륙한 거지? B737-700이다. 전 세계 LCC들이 주로 사용하는 B737-800 기종보다 길이만 조금 짧다. 아르헨티나 공군 군용기라 도장은 푸른빛이 도는 회색이다. 국방색의 원피스 비행복을 입은 남녀 군인이 내려 비행기 동체를 둘러보고 있다. 동체에 표시된 T-88을 검색했다. 2004년 3월에 처음 에티오피아항공에 인도되어, 10년 뒤에는 SAS항공으로 날다가, 2021년부터 아르헨티나 공군이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2년이 된 비행기다.
오늘 이 비행기의 항로는 아침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발하여 Mar del Plata, 바이아블랑카를 거쳐 바릴로체까지 갔다가, 오후에 역순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오는 것이다. 바이아블랑카를 이륙한 비행기는 동쪽으로 대서양 해안선을 따라 마르델플라타로 날아간다. 팜파스의 거대한 농장들 위를 날아간다. 450km가 넘는 거리다.
바이아블랑카와 마르델플라타 구간은 땅이 잘 정리되어 있다. 농지는 크고, 경계는 명확하고, 색의 변화도 규칙적이다. 직선으로 나뉜 토지들이 반복되고, 사이사이 녹색 원형의 땅도 보인다. 이 지역이 곡창지대임이 확실하다. 하늘에서 보면 이 평원은 단순한 팜파스 평원이 아니라, 오랫동안 농업을 위해 최적화된 것처럼 보인다. 사용 목적이 분명한 땅은 위에서 볼수록 정돈되어 있다. 바다휴양지라는 마르델플라타가 보인다. 해변을 따라 높은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고, 그 배후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승객이 마르델플라타에서 내린다. 안데스 산맥 가까운 '남미의 스위스'란 별명을 가진 바릴로체 사람들이 해변휴양지인 마르델플라타에 온 것이다. 하기한 사람은 오십 명이 넘었는데 새로 탑승한 승객은 여섯 명이다. 거의 텅 빈 비행기가 가뿐히 마르델플라타 활주로를 날아오른다.
마르델플라타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구간은 지면의 질서가 느슨해진다. 큰 필지가 눈에 띄지 않고, 경계도 불분명하다. 경작지가 간간이 보이지만 대부분 비경작지다. 숲은 보이지 않고, 마을의 흔적도 나타나지 않는다. 땅은 비어 있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보이지도 않는다. 사용되지 않는 토지가 넓게 펼쳐진다. 이곳은 도시의 외곽도 아니고, 생산의 배후지도 아니다. 선택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땅처럼 보인다. 어떤 땅은 선택되었고 어떤 땅은 버려졌다. 바이아블랑카 쪽은 곡창지대인데, 마르델플라타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이의 평원은 기능하지 않는다. 그 차이가 하늘에서는 보인다. 왜일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서쪽과 북쪽의 평원이 곡창지대고, 바이아블랑카 부근의 평원은 수출을 주로 하는 곡창지대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쪽 평원은 굳이 갈아엎어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어 소를 방목하는 땅이란다. 그래서 하늘에서 보면 버려진 땅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AI가 알려준다. 이미 곡창지대가 넘쳐나 굳이 농사를 지을 이유가 없는 땅이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영공에 들어섰다. 멀리 바다 건너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가 어렴풋이 보인다. 아래는 계획된 도시가 넓은 평면에 어마 무시하게 펼쳐져 있다. Gran Buenos Aires라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시권역은 인구가 1,6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내려다보고 있는 평지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큰 공항이 두 개 있다. 도심과 가까운 AEP가 있고,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EZE가 있다. 단거리는 AEP, 장거리 국제선은 EZE다. AEP 착륙을 위해 Gran Buenos Aires 전역을 크게 선회한다.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난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