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페페씨의 생활의 발견]
확실한 게 좋다. 산뜻하고 분명한. 약속도 말도 관계도.
확실히 확실한 게 좋다.
몇 살이 되면 학교에 가고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대충 몇 살 언저리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연금을 붓고 아파트 평수를 넓혀가고. 다수가 살아가는 패턴. 패턴은 마켓의 대다수가 그려낸 정규분포이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그래서 우리는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온 힘을 쓴다. 학교를 졸업하고자, 직장에서 잘리지 않고자, 나이 대에 맞춰 제시되는 거주의 형태를 확보하고자. 그런데 그게 참 힘들다. 그 표준 안에 들어가기가 대충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안간힘을 써야 한다. 잠시 숨 고르기 하려다가는 속도에서 밀려나 복구가 쉽지 않다.
창의적으로 살기를 꿈꾼다. 창의적으로 산다는 건 무엇일까. 기본 선이 하나도 없는 하얀 도화지에 처음부터 그려 나가는 느낌일까. 아침에 일어나면 어딘가로 향해 간다. 오피스라 부르는 곳. 거기엔 내 책상과 의자가 버티고 있는 나의 공간이 있다. 내 PC가 켜지고 오늘 내가 할 일이 시작된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직이 내려 준 틀 안에서 오늘 할 일을 내일 할 일 모레 할 일의 연속성 안에서 진행한다.
여행을 꼼꼼하게 짠다고 하면 뭔가 자유로움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비추인다. 꼼꼼함을 슬쩍 숨기고 자유로운 스케줄을 진행해 보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몇 시에 일어나 어디를 가야 하지. 어디는 어떻게 가지. 뭘 먹지. 뭘 어디서 먹지. 어디엔 뭘 먹을게 있을까.
누구의 머릿속에는 점이 찍혀 있다. 누구의 머릿속에는 선이 그어져 있다. 누구의 머릿속에는 도형이 그려져 있다. 저마다 자유로움의 정도가 다르고 역량도 다르다. 점은 선을 그려야 하고 선은 도형을 그릴 수 있다. 도형은 안을 채우는 시도를 해 봐도 좋을 것이다. 저마다의 여건과 기준에서 기준점이랄까 기준선이랄까 기둥이랄까 그게 세워져 있어야 방향을 잡기도 자유를 추구하기도 쉽다.
살면서 분명하지 않은 구간을 지날 때가 있다.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선택을 앞둔 시점에서, 또는 주어져 버린 선택에서. 희미하고 애매하고 정지되어 있다.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방향표시가 없다. 어느 쪽으로든 가야 할 터인데 발걸음을 뗄 수 없으니 답답하다. 언제까지 멈춰 있어야 하는 걸까 두렵다. 안개는 걷힐까. 일단 움직일까. 조금 더 기다릴까. 누군가 올까. 소리를 질러 볼까.
이럴 때 내가 의지하는 건 궁즉통. 궁하면 통한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갖고 기다려 보자. 절대 안 움직일 것 같은 상황에도 분명 움직임이 생긴다. 변화가 생긴다.
불확실성 속에 놓일 때가 제일 힘든 시간일 수 있다. 뭐든 하고 있으면 움직이고 있으면 마음의 부대낌은 적다. 뭔가 살아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러나 이건 아침에 눈을 떠 사무실에 도착해 PC를 켜고 그냥 흘러가도 될 때의 얘기다. 동서남북 방향을 모르는 상황에서 그저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은 초조함에 지는 것이다. 지나고 나서 보면 그 애매했던 시간이 꼭 필요했구나 감탄하곤 한다. 그때 애걸복걸하는 마음에 지지 않기를 잘했다고, 그 구간을 담담히 받아 들이기를 잘했다고, 무사히 통과하여 감사하다고, 이번에도 다음에도 꿋꿋이 그랬으면 좋겠다고.그럴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