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 과목이 수학이 되기까지
중학교 2학년,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영어와 수학 '우열반 제도'를 시행했다.
한 반이 '잘하는 그룹 A반'과 '못하는 그룹 B반', 두 그룹으로 나뉘었고, 1학년 성적을 바탕으로 나는 영어와 수학 모두 A반에 배정받았다.
영어는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수학이었다.
A반 수업 첫날, 선생님은 자기소개를 간단히 마친 후 바로 의자에 앉더니, 공식 하나 가르치지 않고 바로 문제풀이를 시켰다.
강남 8학군, 선행학습을 해 온 아이들이 대부분인 곳이었다. 하지만 과외는커녕 그 흔한 학원 하나 다니지 않았던 나는 1번 문제부터 헤맬 수밖에 없었다.
문제풀이가 끝나갈 즈음, 선생님은 한 명씩 불러 칠판 앞에 나와 문제를 풀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10개 남짓한 문제 중 하나는 내게 할당되었다.
"선생님, 저 이 문제 모르겠는데요"라고 차마 말은 못 하고, "아직 거기까지 못 풀었다"고 대충 넘기며 상황을 모면했다.
그때의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운 마음을 잊지 못한다.
그렇게 몇 달을 헤매던 나는 결국 중간고사 후 B반으로 내려갔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그런데 B반에 들어가니 완전 딴 세상이었다.
선생님이 분필을 색깔까지 바꿔가며 칠판 가득 공식 정리, 문제풀이를 하고, 진짜 목이 쉬도록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1학기 기말고사 후 나는 다시 A반으로 올라갔다.
A반 꼴찌가 B반 에이스가 되고, 그 B반 에이스가 다시 A반 꼴찌가 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아 엄마한테 SOS를 쳤고, 같은 아파트 위층에 살던 선생님을 한 분 소개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분을 만난 게 내 학창 시절 손에 꼽는 행운이 될 줄이야.
이 선생님은 경력이 아주 오래된 동네에선 꽤나 유명한 분이었는데, 단순히 문제풀이에 그치지 않고, 수학 공식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는 스타일이었다.
원리를 이해하니 공식이 쉽게 외워졌고, 공식이 외워지니 문제풀이가 쉬워졌다. 문제풀이가 쉬워지니 수학 성적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수학이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되었고, 어두운 독서실 작은 책상에 앉아 수학 문제집을 푸는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되었다.
회계사로 일하고 있는 지금 그때를 가끔 생각한다.
한참을 돌고 돌아 이 길로 들어서긴 했지만, 그때 수학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졌던 점, 수학에 흥미가 생기니 공부가 재미있어졌던 점,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던 점 모두가 나의 회계사 라이프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그때 그 선생님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덕분에 수학의 재미를 알았고, 지금은 매일 숫자를 들여다보며 살고 있다는 얘기를 꼭 전해드리고 싶은데, 연락이 끊긴 지금 감사인사를 전할 길이 없다.
지금은 쉰이 넘으셨을 선생님, 어디에 계시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
사진 출처: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