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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Lee Jun 15. 2023

외국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

아주 사소한 차별 (하)


*이전 포스팅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전 글을 먼저 보고 오시는 걸 추천합니다.




CPA 최종시험 합격 발표가 나자 기다렸다는 듯 (연봉을 더 많이 주는) 다른 회사로 훌훌 떠나가는 동료들을 볼 때도 내 자리를 지켰던 나였다. 대단한 애사심은 아니어도, 나를 뽑아준 회사와 내 사수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미팅에 한번 초대받지 못했다고, 고작 한 명의 파트너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회사가 싫어졌다고 하면, 누가 나를 이해해 줄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뿐이었으랴. 작고도 작아서 누구한테 하소연하기도 민망한 그런 자잘한 사건들, 초대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박수받지 못하고, 심지어 존재까지 부정당했던 경험이 왜 이것뿐이었겠나.



다만 사건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너무 작고 별일 아니라서, '고의는 아니었을 거야',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정작 그런 말을 내뱉은 사람은 기억도 못할 일을, 오롯이 받아내고 그 의미를 순화해 좋게 좋게 넘기는 일까지 모두 내 몫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하는 게 맞는 줄 알았다.


내 감정이 불편할 때도 그 불편한 감정조차 부정하려 했다. 더 마음이 넓고 큰 사람이 되지 못하는 나를 끊임없이 자책하고, 지나간 일에 여전히 마음이 쓰이는 나의 예민함을 탓했다.


그렇게 마음이 힘들어 이리저리 헤매던 어느 날 이 책을 만났다.



<So you want to talk about race>라는 인종차별에 대한 책이었는데, 그중 한 챕터가 유독 내 마음을 울렸다.


"Micro-aggression", 의역하면 "아주 사소한 차별 (혹은 공격)"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 길지도 않은 한 챕터를 여러 번 끊어 읽어야 할 정도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그 공감은 예전 기억에 대한 상처이자, 동시에 그 상처를 보듬는 위로가 되어 돌아왔다.



책에서 말하는 '사소한 차별'은 다음과 같았다.


누군가 당신의 팔을 펜 끝으로 찔렀다고 가정해 보자. 장난이었을 수도 있고 실수였을 수도 있다. 크게 아프지 않았고 당신도 웃으며 넘길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와서 또 찌른다. 이번에도 역시 그리 큰 상처는 남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을, 몇 달을, 몇 년을, 회사에서, 식당에서, 거리에서,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당신의 팔을 계속해서 찔러댄다. 어느 순간 상처가 남고 그 상처가 아물어 생긴 딱지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 옆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긴다. 어떨 땐 찔렸던 데를 또 찔리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곳엔 고름이 차고 이제 팔 전체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옆에 있던 사람이 펜을 들기만 해도 갑작스러운 공포를 느끼거나, 필요 이상으로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 사소한 차별은 그래서 위험하다.


Credit: Marcie Hopkins, U of U Health


"오, 너 영어 되게 잘한다"
"아시아인은 다 매운 거 잘 먹는다면서?"
"어느 나라에서 왔어? 너희 부모님은?"
"한국인이면 중국어나 일본어도 잘하겠네?"


같은 말은 정말 셀 수 없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진짜 참기 힘든 건 그런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함께 있지만 '나는 이 그룹에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 그런 소외감이 참 견디기 힘들었다.


어떤 사람도 "오늘은 내가 아주아주 사소한 일로 J를 차별해야지"하고 나에게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차별이고 상처가 되는 말들이 일상 속에 비일비재했고, 너무나 사소해서 당시에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상 속의 차별은 '나는 이 사람들과 다르거나 못하고, 그들만큼의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혹은 '이 사람들과 같은 대우를 받기 위해선 두 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믿게끔 했다.


Creator: nadia_bormotova | Credit: Getty Images


하지만 저자는 말했다.


모든 차별에 공격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차별에 대응할 '권리'는 있다고.


그리고 당신이 그런 선택을 했다면, 그건 당신이 지나치게 예민해서가 아니라,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런 말과 행동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하는 그 사람들이라고.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내 속상함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예민하고, 내가 속이 좁아서 그때의 일을 아직도 상처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슬픔은 당연하며 잘못은 그들에게 있다고... 아무도 내게 해주지 않았던 그 말을, 일면식도 없는 저자가 내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이 책을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잘못이 아니구나.

미워해도 되는구나.



나는 지금도 그 파트너 L이 밉다.


고의였든 아니었든 나를 계속해서 잊은 것, 모든 후배들 앞에서 나를 투명인간 취급한 것, 그에 대한 단 한 번의 진심 어린 사과도 없었던 것, 그 모든 일로 나는 그녀가 밉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어떻게든 포장해 좋은 기억으로 가져가려던 노력을 멈추자, 오히려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나의 감정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야 나는 그녀를 충분히 미워했고, 이제야 드디어 그 일을 과거에 둘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출처: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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