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딩 시절, 쿨 노래를 참 좋아했었다.
심지어 고3 때는 쿨의 6.5집 앨범 하나만 1년 내내 들었는데, 쿨의 노래 대부분이 적당히 밝으면서 너무 쳐지지도, 너무 시끄럽지도 않아 공부하며 듣기에 딱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나에게 있어 '쿨 노래'는 집중력을 높여주는 'ASMR'이자 '엠씨스퀘어'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듣고, 별생각 없이 따라 부르던 그 노래를 최근에 다시 듣게 되었는데...
그 가사가 참으로 이상하다.
일단 맥락 없이 그저 말 끼워 맞추기 식으로 쓰인 가사가 너무 많다. 거기에 뭔 노래마다 이렇게 양다리 혹은 바람피우는 내용이 많은지.
1. <운명>은 대표적인 양다리 송이다.
동시에 두 여자를 만나는 게 너무 바쁘고 힘들며, 같은 영화 이 여자 저 여자랑 보고 저녁식사도 두 번씩 하며 지냈지만, 결국엔 편지에 적은 이름이 틀려 걸렸다는 내용.
그런데 "그래서 미안했다, 그래서 잘못했다, 이제는 반성한다..."가 아니라 그 상황이 너무 답답하고 짜증 난다며, 둘 다 놓칠까 걱정된다는 가사로 마무리가 된다.
<운명> - 이승호 작사
(3집 - 1996년 발매)
세상에 누구도 나보다 바쁜 사람 없을걸
동시에 두 여자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었어)
어쨌든 그때는 여자복이 터진 것처럼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거야
한번 봤던 영화 또 보고 했던 얘기 다시 또 하고
저녁식사 두 번 했더니 왜 그렇게 헷갈리던지
같은 편지 적어 보냈지
며칠 후에 날벼락이 떨어졌어
겉과 속의 이름 틀렸었나 봐 (이야이야이야이야)
정말 답답해 짜증이나 어떡해야 해
둘 다 똑같이 사랑할 순 없는 거잖아
정말 이러다 둘 다 모두 놓칠 것 같아
차라리 이럴 땐 남자가 되고 싶어
2. <해석남녀>에서는 여자를 대놓고 우습게 봤다.
여자는 그저 미모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여자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에 비유했다. 바람처럼만 산다면 미인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
그런데 그러면 뭐 하나? "양귀비도 2박 3일"이라며 금세 지겨워졌다는데?
"여자가 '아니라'고 하는 말은 괜히 좋으면서 하는 소리"라는, 지금 시대라면 여기저기서 공격받기 딱 좋은 가사도 나온다.
<해석남녀> - 이승호 작사
(5집 - 2000년 발매)
(재훈)
남자는 뭐니 뭐니 해도 내세울 건 능력이라지만
여자는 곧 죽어도 미모란 사실을
오 영웅은 미인들만 차지해
용기가 있는 자는 그렇지
열 번을 찍을 만큼 참을성도 필요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
여자는 별로 다를 게 없어 오
바람처럼 이 세상을 산다면 미인은 내 거야
(성수)
물론 너를 처음 봤던 그 순간에
다리에 힘이 쫙 빠지고 정말 끝내줬지
하지만 양귀비도 2박 3일
결국엔 얼마 못 가 나도 슬슬 지겨워졌지
(재훈)
여자는 괜히 좋으면서 이런 말도 하지
아직은 아니라는 아리송한 말
도대체 알고 하는 소린지
진짜로 때가 아닌 거라면
왜 맨날 밤늦도록 가지 말라 하는지 오
3. <Sad Cafe>는 남녀 둘 다 딴생각하는 내용이다.
남자는 여친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 반하고, 여자도 남친 뒤에 다른 남자가 더 멋있어 보인다는 내용.
그런데 정말 웃긴 건 김성수의 랩 파트다.
어떻게 이렇게 유혹 많은 세상 속에
어떻게 온전히 사랑할 수 있나 싶어
로 시작하는 그의 랩은 "사랑이 움직일 수 없게 하는 칸막이 레스토랑"이 그립다는 가사로 마무리가 되는데 정말 이런 얼토당토않은 가사를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 모르겠다.
<Sad Cafe> - 이승호 작사
(7집 - 2002년 발매)
(재훈)
내가 왜 이럴까?
자꾸만 너의 뒤에 그녀가 보여
고개를 돌리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와
(유리)
정말 이럴 때는 어쩌나.
아무리 너만 바라보려고 해도
왜 자꾸 너의 뒤에 멋진 남자 신경이 쓰일까?
(성수)
어떻게 이렇게 유혹 많은 세상 속에
어떻게 온전히 사랑할 수 있나 싶어
이렇게 사랑이 움직일 수 없게 하는
칸막이 레스토랑 그리워
4. <아가씨와 건달들>은 남녀가 춤추다가 서로에게 반하는 내용...
인 줄 알았다. "그녀의 몸짓이 나를 미치게 한다"는 가사가 청소년이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부르기엔 다소 선정적으로 보일 순 있겠으나, 뭐 남녀 사이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내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김성수 랩 파트에서 대박 반전이 나온다.
난 원래 유부남인데 괜히 한 번 그래봤지
I'm sorry
내 사랑하는 마나님 갑니다 Go Home
으잉? 이게 뭔 말? 그러니까 유부남이 나이트에 가서 춤추다가 '그녀'의 몸짓에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결국은 정신 차리고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간다는 얘기였네?
그래도 마지막엔 정신 차렸으니 고-오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하아...
<아가씨와 건달들> - Sky 작사
(9집 - 2004년 발매)
(재훈)
향기가 좋네요 그대 머릿결이 나를 스쳐요
음악에 취하고 향기에 취해 정신 못 차려
어쩌면 난 그대에게 빠졌나 봐
(유리)
음악이 좋네요 내 몸은 흠뻑 젖어버렸죠
가슴이 쿵쿵쿵 터져 붐붐붐 야릇한 느낌
이러다 사고 치겠어 나 어떡해
(재훈/유리)
어느새 step step 완전히 다가가
(이러다 우리 둘이 노노노)
이대로 take take 살며시 안으며
(그러다 우리 둘이 예예예)
완전히 safe safe 그녀를 내 품에
(재훈)
신나게 춤을 춰요 dance dance dance
그녀와 나는 춤을 추고 싶어요
조금 더 흔들어도 shake shake shake
그녀의 몸짓이 나를 미치게 해요
(성수)
오늘도 난 새 돼버렸지 내 팔자가 그렇지
난 원래 유부남인데 괜히 한 번 그래봤지
I'm sorry
내 사랑하는 마나님 갑니다 Go Home
이런 표현 정말 미안하지만, 노래 가사가 다 왜 이렇게 후진지.
양다리, 바람, 딴짓을 이렇게 가볍게 가사에 녹여내고, 그런 노래를 쿨 특유의 발랄함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을 나와 내 친구들은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부르고 다녔던 거구나.
그런데 또 정말 재밌는 건, 이 글 쓰겠다고 쿨 예전 뮤직비디오 찾아보는 내내 그들의 장꾸스러운 무대매너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온다.
가사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그때는 즐겨 불렀고
가사를 알게 된 지금은 내용이 영 마뜩지 않지만
지금도 멜로디만 들으면 여전히 어깨가 들썩이는 건 쿨의 힘이자, 추억의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앞으로는 예전만큼 이 노래들을 즐겨 듣게 될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