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 you vegetarian?"
10년 전, 내 철분 검사 결과를 확인한 내 담당의가 내게 건넨 질문이었다.
철분 수치를 평가하는데 쓰이는 '페리틴 (Ferritin)' 검사에서 '7'이라는 너무 터무니없는 숫자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래표에 따르면 15-100은 철분 결핍 가능성이 있고, 15 미만이면 '철분결핍'이라는데 나는 아예 한 자릿수가 나왔으니 이건 뭐 내 몸엔 철분이 거의 없다는 뜻 아닌가.
채식주의자라니요,
제가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의사: 항상 피곤하신가요?
나: 퇴근하고 나면 피곤하죠.
의사: 금요일 저녁에 보통 뭐 하시나요?
나: 집에서 저녁 먹고 쉬는데요?
의사: 하아... 그 나이에 그러시면 안 됩니다. 불금에는 나가서 맥주도 마시고 놀아야죠.
이 농담 같은 대화가 당시 의사와 실제로 주고받은 대화였다.
그랬다, 나는 늘 피곤했다.
캐나다에서의 직장생활은 한국과는 비교도 안되게 그저 순두부같이 말랑한 강도였음에도 퇴근 후 저녁 시간엔 어김없이 집순이가 됐다. 내 머리에 있는 모든 기능을 정지시키듯 머릿속 스위치를 탁탁탁 끄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만 다음날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철분이 부족하면 에너지 레벨이 높을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바로 '철분 수치 끌어올리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1. 식단 개선
우선 의사의 권유대로 식단에 변화를 줬다.
멸치, 고기, 시금치 등 철분 함량이 높다는 음식을 더 챙겨 먹었고, 평소에 잘 가지 않던 코리안 바비큐 레스토랑에도 한 달에 두어 번씩은 가서 고기 파티를 했다.
하지만 6개월 후, 변화는 없었다.
2. 철분제 복용
다음 단계로 의사는 철분제 복용을 권했다. 의사가 권해준 철분제를 먹었는데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아, 혹시 약이 안 맞아 그런가 싶어 한국에서 다른 철분제를 사다가 그걸 또 3개월 이상 먹었다.
다시 피검사, 결과는? 의미 있는 변화 없음.
이쯤 되니, 나란 사람, 아예 철분 흡수가 안 되는 체질이 아닐까 의심이 됐다. 음식으로도 안되고 심지어 철분제를 복용해도 수치가 겨우 10을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으니.
3. 철분제 주사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은 철분제 주사였다.
의사 왈, 효과가 100% 보장된 방법이긴 하지만 건강보험으로는 커버되지 않아 비용이 꽤 들고, 주사 한 번으로 평생 가는 일도 아니라며, 나처럼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철분 끌어올리기 프로젝트를 허무하게 마치고 다시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왔고, 그 후 10년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작년부터 어지러움 증상이 조금 더 심해진 걸 느꼈다.
내 경우는 특이하게도 꼭 밥을 먹을 때마다 어지러움을 느꼈는데, 첫술을 뜨고 나면 5초 정도 띵- 하면서 어지러운 증상이 매 식사 시간 반복됐고, 결국 의사를 찾았다.
오랜만에 철분 수치를 다시 검사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다시 7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죽을병' 아니니 그냥 살아도 된다던 예전 그 의사와는 달리, 새로 만난 의사는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철분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영양소입니다.
임신을 하지 않았다고, 혹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없어도 되는 영양소가 아니에요.
철분이 부족하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나요? 단순히 조금 피로한 것 외에도 산소 공급 부족으로 인해 여러 증상이 수반될 수 있어요.
그걸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하지 않나요.
철분 결핍에 따른 증상
- 신체적 증상: 피로감, 어지럼증 및 두통, 창백한 안색, 숨 가쁨, 손발 차가움
- 신경학적 증상: 집중력 및 기억력 저하
- 기타 증상: 면역력 저하, 식욕 부진, 손톱 변화
그러고 보니 나는 피로감과 어지럼증 외에도, 창백한 피부와 숨 가쁨, 차가운 손발 등 많은 증상을 갖고 있었다. 다만 워낙 오래된 증상들이다 보니 그 모든 것에 익숙해져 그러려니 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너무나 타당한 의사의 논리에, 그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방치한 내 몸에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결국 철분제 주사를 맞기로 결정했다.
한국에서는 철분제 주사값이 얼만지 모르겠다. 암튼 여기는 비싸도 너무 비싸다.
나는 1회 최대치 용량 (Monoferric 1000mg)을 맞았는데, 고작 어른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그 작은 병 하나가 무려 550불이었다. 내 경우 회사 보험으로 100% 커버가 됐지만, 사비로 지불해야 한다면 선뜻 진행하기엔 꽤나 부담되는 가격일 듯했다.
약속한 날짜에 클리닉을 다시 방문했다. 의사는 친절하고 꼼꼼하게 내 컨디션을 체크하고 주사 맞는 과정, 효과, 부작용 등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었다.
주사 맞는 시간은 20분 정도로 길지 않았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등 약간의 부작용이 있었으나, 하루 정도 지나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6주를 기다렸다.
6주, 철분제 주사가 흡수되고 완전히 자리 잡는 데 걸리는 시간.
그렇게 약속한 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가서 피검사를 했다.
결과는?? 짜잔-
105라니! 세상에, 늘 한 자릿수만 기록하던 내 페리틴 수치가 무려 100을 넘었다. 철분제 주사의 효력을 제대로 느낀 순간이었다.
페리틴 수치가 정상이 되면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늘 궁금했었다.
늘 기운이 샘솟고 에너지가 만땅인 기분일까?
도대체 페리틴 수치가 100이 넘는 사람들은 평소에 어떤 에너지 레벨을 품고 사는 건지, 평생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를 만나게 될까 너무 궁금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나는 여전히 퇴근 후에는 집순이고, 불금 따위 내 인생에 없는 단어며, 하루 종일 밖에서 기 빨리고 돌아오면 이틀은 쉬어줘야 하는 사람이다. 생각해 보니 이거 철분 수치와 관계없이 그냥 내 성격이었네 ㅎㅎ
그럼에도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어지럼증이 확연히 줄었고 고강도 운동을 해도 전보다는 숨이 덜 차는 게 느껴진다.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지만, 그간 진짜 쬐-끔 있는 철분 나눠 쓰느라 고군분투했던 내 몸이 그래도 조금은 편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잘한 일 같다.
앞으로도 매년은 아니더라도, 2-3년에 한 번씩은 챙겨줘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하물며 식물도 영양제를 맞는데, 24시간 애쓰는 고마운 내 몸에 작은 선물 하나 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