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도 뺏기고 비행기도 놓치고
9월 30일, 인천공항에서 가족과 눈물의 작별인사를 한 뒤, 9시간을 넘게 날아 밴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내가 사는 빅토리아로 가기 위해선 비행기를 한 번 갈아타야 하는데, 그 환승 과정이 꽤나 길고 복잡해 2시간 반의 대기시간이 있음에도 서둘러야 했다.
밴쿠버에서 빅토리아로 환승하는 과정:
1. 키오스크에서 세관신고서 작성
2. 입국심사
3. 짐 찾기
4. 세관신고서 용지 제출
5. 짐 다시 부치기
6. 보안검색대 통과
7. 비행기 탑승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줄 서기'가 포함된다.
문제는 4번 세관신고서 용지를 제출할 때 생겼다.
키오스크에서 작성한 후 받은 용지를 제출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세관원들이 돌아다니며 랜덤으로 사람을 골라 자세한 조사를 시행하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운 나쁘면 걸리는 복불복 시스템이었다.
우리에겐 일반적으로 세관원의 눈에 띌만한 이유 (예: 면세에서 산 물건이 많거나, 짐이 지나치게 많은 경우)가 없어 별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한 세관원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여럿이 조사를 받고 있었고, 대기 의자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꽤 많았다. 내 순서를 기다리며 쭉 지켜보니, 인종도 다양하고 연령대에도 제한이 없어, 나이가 지긋하신 노부부부터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까지 참 다양하게도 '잡혀와' 있었다.
우리는 면세에서 쇼핑을 하지 않았고, 크게 걸릴만한 게 없어 걱정이 되지는 않았지만, 단지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놓치지는 않을까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렸다.
30분쯤 기다리자 아까 우리를 잡아 온 세관원이 먼저 남편 이름을 불렀다. 남편 가방'만' 가져오라는 지시와 함께. 남편이 우리 물건이 여기저기 섞여 있다고 하자, 그런 거 상관없고 짐 부칠 때 남편 이름으로 부친 게 바로 남편 가방이라고 차갑고 딱딱한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부친 짐은 4개, 택을 보니 2개는 남편 이름, 2개는 내 이름으로 되어 있었고, 남편은 자기 가방 2개를 들고 조사대로 갔다. 세관원이 가방을 열고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보며 조사했고, 식품 몇 개는 압수당하는 듯 보였으나, 자리가 멀어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는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한참 뒤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남편과 정반대인 왼쪽 끝 조사대로 불려 갔다. 우리 둘을 일부러 떨어뜨려 놓는 것 같았다. 가방을 올려놓자마자 질문이 쏟아졌다.
결혼한 사이냐?
결혼한 지 얼마 됐느냐?
직업은?
회사 이름은?
남편 직업은?
그리고는 가방 2개에 옷 외에 뭐가 있느냐 물어봤다.
가방을 대부분 남편이 싼 탓에 어느 가방에 뭐가 들어있는지 정확하게 몰라, 내가 "아마도"라는 말을 붙여가며 자신 없게 대답을 하자, 니 가방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냐고 내게 질책하듯 물었다. 내가 가방을 남편이 싸서 그렇다고 답하자 돌아오는 말이 가관이었다.
네 남편이 네 가방에 마약 같은 거라도 몰래 넣었으면 어떡할래?
"네가 싼 네 물건이 아니라도 네 이름으로 된 가방에 들어 있으면 처벌은 네가 받는 거야, 알아?"
어이가 없었다. 내가 "Well, I trust my husband." 라고 답하자 가소롭다는 듯 비웃던 그. 하지만 그런 걸 따지고 대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곳에선 모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 대하듯 하고 있었고, 그나마 신분이 확실한 나한테는, 내가 가지고 온 '물건'에 대한 것만 문젯거리를 삼았지만, 옆에 있던 어떤 남자는 마치 취조받는 것처럼 질문 폭탄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가방 한 개는 주로 식료품을 담았던 가방이라 그 가방을 특히 철저히 조사했는데, 그런 용도로 아예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고용한 것 같았다. (그분은 정식 세관원은 아닌 듯 보였다)
그 아저씨가 안경을 쓰고 식품 하나하나 재료명/성분명을 훑었고, 고기가 단 1g이라도 들어있다고 나오는 건 바로 압수해갔다.
다음은 우리가 뺏긴 식료품 목록:
진라면
스낵면
짜파게티
다담 순두부 양념
다담 부대찌개 양념
천하장사 소시지
짜장 가루
닭다리 과자
특히 다담 양념은 이곳에서 구할 수 없어 내가 한국에 갈 때마다 1순위로 챙겨 오던 식료품이었는데, 양념 10개를 고스란히 뺏기고 나니 너무 속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뺏긴 물건을 다 합하니 총 3kg 정도가 나왔고, 그에 대한 벌금이 무려 $1,300이라고 했다.
하지만 처음 있는 일이므로 이번엔 '경고'만 주고 벌금은 제해주겠다며 대신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때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이미 체력과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라 그냥 땡큐 인사와 함께 이만하길 다행이다고 자위하고 있는데, 그가 압수한 물건을 내 앞에 다시 한번 들어 보이며 "이게 $1,300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다음에 또 갖고 와 보던지"라고 피식거리며 말할 때는 진짜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캐나다에 10년 넘게 살았고, 한국을 여러 번 오갔다.
한국 갈 때마다 캐나다에서는 너무 비싸거나 구하기 어려운 식료품을 늘 바리바리 싸들고 왔었고 그간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던 터라, 안일하게 생각했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은 내 잘못이므로 뺏긴 물건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 분위기가 너무 불쾌했고, 단순히 사실 확인을 하는 질문이라고 하기엔 나에게 던진 많은 질문과 그 어투가 굉장히 무례했다.
친절하기로 유명한 캐나다인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특히 남편이 마약을 넣었다면 처벌은 네가 받는 데 그것도 모르냐는 듯 조롱하던 그 태도에서는, 왜 이런 태도로 이렇게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게 그들의 권리가 되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내내 불쾌한 말투와 행동을 하던 그 세관원은, 모든 조사가 끝나고 우리한테 이제 가방을 싸서 가도 좋다는 말을 한 뒤에야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고, 우리가 다시 짐을 싸기 위해 테이프를 좀 빌릴 수 있냐고 하자, 심지어 같이 테이핑을 도와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비행기를 놓쳤고, 이렇게 또 에피소드 하나를 추가했다.
덧: 글벗님들, 잘 계셨죠? 귀국 신고를 이런 글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사진 출처: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