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유언장을 썼다
작년 어느 날,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한국인 친구 S한테 전화가 왔다.
남편과 유언장을 작성하려고 하는데, 비상시 연락망에 내 이름을 써도 되겠냐고 그녀가 물었다. 만약 부부가 동시에 사고라도 났을 때, (S의 가족이 한국에서 오는 동안) 임시로 아이를 맡아 줄 수 있겠냐는 부탁과 함께.
친구의 딸아이는 나와 내 남편을 유독 따르는 데다가, 나는 한국어와 영어가 둘 다 가능하니 비상시 친구 부모님과 현지 기관 사이에서 소통의 역할도 해줄 수 있어, 나 이상의 적임자가 없다며 부탁해 온 것이다.
그에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이쯤 되면, 내 친구가 혹시 큰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나 보다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내 친구와 그의 남편 모두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들이다.
죽음을 코 앞에 두고 '마지막 인사와 당부'를 전하는 뜻으로 유언을 생각하는 한국의 문화와 달리, 이곳 캐나다에서는 유언이 그저 "만약"을 대비한 합의서/의견서쯤으로 받아들여진다.
유언이 영어로 Will이라는 것만 봐도, 유언을 작성한다는 건 어떤 의지표명의 역할이 더 강하다는 뜻 아닐까?
특히 결혼을 해서 공동 자산이 생기고, 아이가 있는 부부라면, 30대 혹은 20대 젊은 나이에도 미리미리 비상시를 대비한 계획을 짜 놓는 것이 이 나라의 문화이며,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는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캐나다는 매년 10월 첫째 주를 "유언장 작성하기" 기간으로 지정해 유언장 작성 혹은 기존 유언장의 업데이트를 고려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 BC주는 2020년 기준, 50%의 국민이 유언장을 작성했으며, 이는 2018년 대비 6% 증가한 수치로, 매년 그 비율은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다.
또한 2021년 12월부터는 전자 유언장도 같은 효력을 인정함으로써, 유언장 작성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다.
출처: https://www2.gov.bc.ca/gov/content/life-events/death/wills-estates/make-a-will-week
그렇다면 유언장 없이 죽게 되는 경우는 어떨까?
이때는 주정부법 기준에 따라 자산이 분배된다.
배우자 여부, 자녀 여부, 또는 자녀가 친자인지 아닌지 등에 따라 그 세부내용은 달라지지만 크게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분배된다 (BC주 기준).
배우자 -> 자녀 -> 부모 -> 형제자매 -> 조카
하지만 위와는 다른 방식으로 내 자산을 나누길 원한다면 내가 원하는 바를 명확히 제시해놔야 한다.
가족들 간에 분배 비율을 미리 조정할 수도 있고, 내 반려동물을 위해 일정 금액을 따로 정해놓을 수도 있다. 특정 자선단체에 내 자산을 기부하고 싶다면 이 또한 미리 명시해 놓아야 한다.
나아가, 장례절차 및 사후 장기기증 등 여러 가지 세부 사항에 대해 미리 고민 및 논의해 보고 내가 원하는 바를 미리 표명해 놓을 수 있다고 한다.
남편과 이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아이도 없고 가진 자산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서로의 미래를 위해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 놓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을 모았다.
언젠가 남편 혹은 내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런저런 서류작성의 걱정은 최소화하고, 그저 떠나간 사람의 부재를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먼저 떠나는 사람이 남겨질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하기에...
마침 집 근처 추모공원에서 무료로 유언장 양식을 나눠 준다고 하니, 그걸 연습삼아 한 번 작성해 봐야겠다.
사진 출처: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