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Lee Dec 02. 2022

한국에서 온 소포

그리고 엄마의 마음


2021년 나는 마음이 어지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다독이고자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요가와 명상을 했고, 매일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카운슬러 R을 만났다.


R은 내 속 깊은 얘기까지 끌어내는 힘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녀 앞에서는 어떤 얘기를 하든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과 단 둘이 있는 시간엔, 모든 방어벽을 내린 듯 한없이 약해져 울기도 여러 번 하는 나날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있는 가족의 제일 큰 관심사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조카였다. 그 작은 아이는 내게도 하나밖에 없는 너무 소중한 조카였고, 가족 단톡방에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아이의 사진이 올라왔다.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그즈음 언니와 영상통화도 자주 했다.


하지만 내가 힘들단 얘기는 한국에 있는 가족한테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내 밝은 모습만 보였고 마치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가족한테 툭하면 선물을 보냈다.


언니한테는 출산 선물을 했고, 계절별로 조카 입을 옷을 바리바리 담아 소포도 여러 번 보냈다. 돌 선물도 물론 잊지 않았다.


엄마 아빠한테도 틈만 나면 기프티콘을 보냈다.


가족 생일이어서, 기념일이어서, 엄마가 족발을 좋아한대서, 아빠가 집에 혼자 계시대서, 형부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대서, 육아휴직 중인 언니가 가끔은 커피라도 한 잔씩 사 마셨으면 하는 마음에.


나중에는 별 이유 같지도 않은 것을 붙여가며 계속 기프티콘을 보냈다. 그저 ‘주는 행위’를 반복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소다기프트 내가 보낸 선물 내역 중 일부


그 해 말 내가 보낸 선물 히스토리에 들어가 보니, 엄마 아빠한테 13번, 언니한테 4번의 기프티콘을 쐈더라.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일 년 동안 나는 가족한테 받은 게 하나도 없었다. 가족들이 무심해서가 아니었다. 아이를 낳고 육아에 정신이 없을 언니는 그렇다 치고, 엄마는 내가 뭐 필요한 건 없는지 때때로 물으셨는데 매번 괜찮다고 거절한 건 나였다. 여기 다 있으니 아무것도 보낼 필요 없다고.




마음이 유독 허해진 어느 날이었다. 마침 발레용품이 몇 개 필요한 게 있어 엄마한테 그걸 보내달라 말하며, 내 최애 라면인 스낵면을 함께 부탁했다. 배송비가 만만치 않겠지만, 스낵면은 여기선 잘 팔지 않는 라면이라 보내는 김에 몇 봉지 함께 보내 달라고.


나의 고맙단 인사에 엄마는 “너 엄청 비싼 스낵면 먹는 거야”라는 농담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런데 누가 봐도 농담인 그 말이, 가족 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그 한 마디가 왜 그렇게 상처가 되어 돌아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 한마디에 그동안 켜켜이 쌓여왔던, 그러나 쌓이고 있는 줄도 몰랐던, 서운함이 피할 수 없는 파도처럼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리고 그날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카운슬러 R을 다시 만났다. 엄마한테 받은 소포 얘기를 했다. 더불어 나는 일 년 동안 가족한테 얼마큼의 선물 공세를 했는지, 내가 얼마나 서운했을지를, 마치 나 스스로에게 다시 확인시켜주듯 쏟아냈다. 그녀가 나의 서운함의 정당성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 얘기를 끝까지 들은 R이 말했다.


J씨, 제가 J씨한테 숙제를 하나 드릴게요. 다음번엔 어머니가 뭐 필요하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받고 싶은 거 말하세요.

"나 이거 보내 줘. 나 이거 필요해." 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일인데, J씨는 그게 어려운 사람 같아요.


출처: unsplash.com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나는 가족과 떨어져 먼 이국 땅에 살고 있으니 ‘나 잘 살고 있다’고 ‘걱정할 것 하나 없다’고 늘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은퇴해서 일정한 수입이 없는 부모님은 물론, 이제 조카한테 들어갈 돈이 많을 언니와 형부에 비해 우리는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으니, 내가 뭐 하나라도 더 주는 게 맞지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원인은 나한테 있었다.


뭐 보내준다고 할 때마다 절대, 저얼-대 보내지 말라고 그렇게 말려놓고, 여기서 다 사 먹을 수 있다고 괜히 이것저것 사서 보낼 필요 없다고 그렇게 반대해 놓고, 기프티콘 안 보내도 된다는데 내 고집에 계속 보내 놓고, 이제와 ‘나만 계속 주고 너는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안 주냐’ 하는 꼴이었다.




얼마 전에 한국에 갔다 오며 세관에서 식품을 많이 뺏겼다. 다담 순두부, 스낵면, 진라면, 짜장가루까지 내가 아끼는 걸 죄다 뺏어갔다고, 엄마한테 말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J야, 엄마가 사실은 써프라이즈로 하려고 했는데, 너 세관에서 뺏긴 거 엄마가 다시 다 보내주려고. 이왕 보내는 거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엄마가 같이 넣어서 보내줄게."


순간 버릇처럼 또 '아니야, 괜찮아'가 먼저 떠올랐다가, 그와 동시에 카운슬러 R이 내줬던 숙제가 생각났다.


엄마, 그럼 나 초코칩쿠키도 보내줘!




그리고 얼마 후 이것저것 먹을거리가 가득 담긴 상자가 하나 도착했다. 엄마의 마음과 사랑까지 듬뿍 담긴 종합선물세트였다.


엄마 고마워, 잘 먹을게 ❤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