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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Lee Dec 19. 2022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2012년 한 매체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자들이 남자들 앞에서 가장 많이 하는 내숭은 다음과 같았다.


1위: 많이 못 먹는 척 하기 (41%)

2위: 깔끔한 척 하기 (25%)

기타: 약한 척 하기, (남자의 말에) 동의하는 척 하기


이 10년도 더 된, 소스도 불분명한 기사를 우연히 보고 라떼시절 에피소드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대학교 1학년,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개팅이란 걸 했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 첫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처음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풋풋함 그대로 우린 예쁜 연애를 했고, 그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모든 시간이 즐거웠다. 하지만 그런 내게 하나의 고충이 있었는데... 나는 그와 데이트를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내 양껏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많이 먹는 여자는 예뻐 보이지 않을 거라는 이미지에 갇혀, 늘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적은 양을 먹고 배부른 척 연기를 했다.


‘밥밍아웃’을 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나는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갔고,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잠시 떨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내가 종종 가던 음식점에 그를 데려갔다.


3분의 2쯤 먹었을 때 아차 싶은 마음에 얼른 숟가락을 내려놓았는데, 그런 나를 본 그가 한 마디 했다.


땡땡이 너, 못 본 새 양이 늘었네?


속으로는 ‘뭔 소리야. 나 이거 한 그릇 다 먹고 새우깡도 한 봉지 때리는 여잔데’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그동안 먹고 싶은 거 참아가며 힘겹게 쌓아 올린 이미지를 한 번에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쑥스러운 듯 입가를 닦으며 ‘어어, 내가 그랬나?^^;’라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버금가는 연기로 답을 했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순전히 내가 만든 환상의 이미지 속에 나 스스로를 가둬 둔 내 탓이었다.


그렇게 그와 연애를 하는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그 ‘많이 못 먹는 여자‘ 속에서 결국 나오지 못했다.




몇 년 후 또 다른 소개팅이 잡혔을 때,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첫 연애의 힘든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 바로 첫 만남에서 내게 할당된 음식을 무조건 다 먹는 것이었다.


경험상 처음에 이미지 관리한다고 내 양껏 못 먹으면 그걸 중간에 깨기가 너무 어렵다는 걸 알았고, 혹시 여자가 많이 먹는 모습이 싫을 사람이라면 안 만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신촌에 있는 파스타집에서 그와 처음 만났다.


그리고 나는 무슨 지령이라도 떨어진 사람처럼 그와 얘기를 주고받으면서도 내 앞에 놓인 스파게티를 포크에 돌돌 말아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비웠다.



다 먹고 나서야 상대방의 접시가 보였다. 반 이상의 스파게티가 남은 그의 접시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했지만,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이 싫을 사람이라면 내 운명이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편히 먹었다.


그 첫 만남 이후 그와는 몇 년을 더 만났고, 철저히 계획됐던 '스파게티 클리어 미션' 성공 덕분에, 연애 기간 내내 내가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 (반전: 현재 남편은 아님)




1989년에 발표됐던 가수 변진섭의 <희망사항>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주는 여자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라는 가사로, 한 남자의 ‘이상형에 대한 희망사항’이 담긴 이 노래는 90년대 어마어마한 히트를 치고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르는 대박 인기송이 되었다.


가사가 재밌어 당시는 공감을 했고, 나도 한때 많이 흥얼거렸던 노래였지만 이제는 말하고 싶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나, 재미없는 내 얘기에 잘 웃어주는 여자가 이상형일 수는 있다. 그렇지만 밥을 많이 먹어도 배가 안 나오는 여자는 안타깝지만 없다. 우리 발레쌤도 엄청 말랐는데 밥 먹으면 배 나오더라 (선생님 디스 아님).


물론 요새는 시대가 바뀌어서 잘 먹는 여자 연예인도 미디어에 자주 나오고, 그런 모습에 '잘 먹어 예쁘다', '보기 좋다'는 반응이 많은 게 트렌드라 하지만, 여전히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환상에 가까운 이미지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밥 먹으면 배 나오는 게 뭐 어때서?

(밥 안 먹어도 배 좀 나온 게 뭐 어때서? ㅋㅋ)


그냥 내 모습 그대로 편하게 살고 싶다.





*표지 사진은 2017 미스코리아 대회 본선진출자들로 아쉽지만 저는 사진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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