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죽고 또 다시 태어나는 법
“3개월 남았습니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의사의 말을 듣고있는 그녀를 몰래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한 표정이다. 의사는 뇌를 스캔한 MRI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은 시간동안 셀카를 찍으면 증상을 완화하는데 도움될 겁니다.”
이상한 진단이었다. 매일 식후 30분, 약 먹듯이 셀카를 찍으라는 거였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3개월뿐인 것도 억울한데 할수 있는게 고작 셀프 카메라 촬영이라니.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일단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식사 때마다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기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국수가 먹고싶다고 했다. 파스타였다. 언젠가 내가 문자메시지로 보내준 파스타 사진을, 그녀는 애들이 먹는 빨간국수 하얀국수라고 불렀다. 점심시간 그녀와 학교 근처 내가 좋아하던 파스타집에 갔다. 미트볼 토마토, 크림, 알리오올리오 세 개를 시켰다. 뜨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파스타가 나오자 그녀는 먹기 전에 셀카를 찍겠다고 했다. 화면에 파스타가 모두 잡히는지 이리저리 카메라를 맞춰보다가, 결국 얼굴보다 파스타가 더 크게 나온 우스꽝스러운 셀카가 찍혔다. 입맛에 맞는지 두 접시를 뚝딱 해치우는 그녀를 보면서 왜 진작 함께 오지 않았을까 조금 후회가 됐다.
그녀가 규칙적으로 셀카를 찍으면서 달라진 것은, 매일 저녁 시를 쓰게 된 것이다.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날카롭게 연필을 깎고 종이에 몇번 휘갈겨 심을 뭉툭하게 갈아주면 시를 쓰기 시작한다. 낮에 본 코스모스, 지금보다 건강할 때 짓던 고추 농사, 서울로 출가한 자식들, 어린시절 옆집 친구. 그녀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시가 되어 살아났다. 찰칵. 시를 쓰고 나면 기념 셀카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남동생을 위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그녀는 지금에서야 다시 학교를 다니는 것 같았다.
“근데 할머니 영정사진이 왜 셀카야?”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5년만에 만난 사촌동생이 물었다.
“치매셨어. 처녀적 얼굴로 영정사진을 해달라셔놓고선, 당신 돌아가신 날 아침 먹고 찍은 셀카를 고르시더라.”
제사상에는 돋보기 안경을 코에 걸치고 연필을 볼 옆에 들어보이며 웃고있는 그녀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이거 찍을 때 할머닌 몇살이셨을까?”
“글쎄. 어쨌든 자기가 기억하는 얼굴 중에 제일 좋아하는 얼굴 아니었을까.”
그녀, 나의 할머니는 매일 영정사진을 찍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는동안 수많은 사진을 찍고 찍힌다. 그러나 찍는 순간부터 찍히고 남기는 것까지, 내가 원하는만큼 나를 연출할 수 있는 건 셀프 카메라다. 카메라를 켰다. 셀프 카메라로 전환한다. 찰칵. 화장기 없이 조금 푸석한 내 얼굴 뒤로 육개장을 먹는 사람 몇명이 함께 정지했다. 방금 나도 영정사진을 찍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얼굴로 사는 건 나도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이렇게 살고있다고 찍어보는 것. 어쩌면 셀카는 매일 죽고 또 다시 태어났다고 보여주는, 알람이고 다짐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