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벽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Q. 중3 여자입니다. 유도 배워도 될까요?
부드러움이 능히 강함을 이긴다는 슬로건에 반해 유도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이 돼서야 체육관에 등록했다.
“양말 벗어야 돼요.” 도복을 갈아입고 매트를 밟으려는데 탈의실에서부터 지켜보던 중등부 선수가 말렸다. 성인이 되고는 타인 앞에서 양말을 벗어본 일이 없어서인지, 맨발로 쭈뼛 말랑한 매트 위를 걸으니 자꾸 웃음이 났다. 통성명도 없이 구호에 맞춰 준비운동이 시작됐다. 그러더니 대뜸 ‘다리 벌려 앞구르기!’하며 앞에서부터 줄이 착착 줄어들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갈까? 생각한 순간 앞사람의 구르는 엉덩이가 보였고, 엉겁결에 따라 굴렀다. 체육관의 문법을 배운 순간이었다.
“제대로 넘어져야 안 다칩니다.” 관장님이 낙법 시범을 보였다. 그 말을 곱씹으며 어색하게 낙법을 쳤다.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방에 가듯이 서울 한복판에 평생 구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
Q. 노래를 말하는 것처럼 편하게 하고싶어요.
혜화역 1번출구 수요일 저녁 8시. 동갑내기 선생님에게 보컬트레이닝을 받기 시작했다. 첫 곡은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레슨을 하면 바이브레이션이나 고음 내기를 기대했는데, 부르는 것보다 듣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일주일 동안 한 곡을 붙잡고 가수가 어디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지 어디서 음을 떠는지 곡을 잘게 분해한다. 공강 시간이면 학교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밀크티 한 캔을 뽑아놓고, 세로로 넘기는 노트에 가사를 쭉 적는다. 노트에 옮겨적은 가사는 꼭 시같다. 같은 구절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힘주어 불리는 부분마다 빨간펜으로 체크했다. 처음에는 영어 듣기평가처럼 들리던 것이, 들을수록 기분과 감정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V오직V그으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반주에 맞춰 1절을 부르니 선생님이 오늘은 좀 다르단다. 사실 그날은 후렴을 부르는데 누구 얼굴이 스쳤다. 그걸 용케 알아챈 선생님에 뜨끔했지만 모른척 웃었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감각기관이 하나 늘었다. 벽을 눕히면 진짜 다리가 된다.
Q. 카라멜마끼아또는 왜 마끼아또인가요?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게 무서운 때가 있었다. 직원의 설명을 대충 알아들은 척하며 코끼리 다리 만지듯 혀로 더듬더듬 커피맛을 알았다. 정체를 알면 더 즐겁게 마실 수 있지 않을까?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스팀기계로 찬 우유를 데울 때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되면, 게거품이 올라간 라떼를 받을 확률이 80%. 적당히 소음을 내다 무거운 소리로 바뀌면 거품이 벨벳처럼 부드러운 라떼를 마실 수 있다. 라떼보다 우유는 적고 거품이 많이 올라가는 것이 카푸치노. 가벼워서 양이 적다고 느낄 수 있지만, 에스프레소를 진하고 부드럽게 즐길 수 있다. 빨대없이 기울여서 우유거품을 여과해 시나몬 파우더와 함께 마시면 풍미가 더 좋다.
이제는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해도 좋아하는 맛을 찾아 조율할 수 있다. 종종 친구들이 좋아할 커피취향을 대접하기도 한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두지 않을 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화수분처럼 확장된다. 벽을 눕히면 언제나 다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