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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드림 hd books Mar 16. 2018

금고 비밀번호를 공개합니다

금고 비밀번호를 공개합니다        


1.

새해 어느 날, 사무실 복도에는 작은 금고 하나가 쪽지를 붙인 채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가난한 내가 금고야 궁금할까마는, 그 사연을 슬쩍 훑어보았다. 

 ‘15만 원에 가져가세요.’

군잎 없이 간단명료하다.

5만 원권 현금 일억 정도 채우면 가득 찰 크기였으나 겉으로는 육중하면서도 있이 사는 집안처럼 보였다. 나름대로 금고로서 품위도 엿보여 마치 금괴라도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나귀 샌님 대하듯, 일주일 남짓 지나쳐도 쪽지는 떨어져나갈 기미가 없었다. 

 "우리 사무실에나 들여다 놓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사무실에서는 넣어둘 게 없었다. 

 '혹시 알아, 금고 들여놓으면 채울 게 들어올지….'

차츰 눈길을 트니 빈 금고로 놓아두어도 마음은 든든할 듯싶었다.

나무에다 새집을 매달아두면, 결국 새가 날아와 짝도 데려오고 자식새끼도 치면서 산다. 제비도 집이 있으니 처마 밑으로 날아드는 것이다. 집이 있으면 제비가 들어오고, 흥부네 박도 생기는 거 아닌가. 결국 밑절미는 집이다.

가난한 사람이 금고를 들이려니 언턱거리만 떠올랐다.

‘제법 귀티 나고 세련된 집을 돈들이 그냥 비워둘까. 서로 앞다투어 들어오려고 안달을 하겠지.’ 

금고는 무거워야 맛인가 보다. 

가볍게 끌고 올 줄 알았던 금고는 사무실 바닥을 짓찢기며 들어와, 보란 듯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비밀번호를 무얼로 할까. 명색이 금고인데 근사한 비밀번호를 지어줘야지. 내가 누구인가. 숫자로 말 만드는 데는 귀재 아닌가.’

머리 굴릴 필요도 없이 금세 비밀번호가 튀어나왔다.

16784 

일류 출판사!

일(1)류(6)출(7)판(8)사(4), 번호를 암기할 필요도 없다.

일류 출판사가 되면 당연히 새들 또한 날아들 것이다. 

2.

우리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는 대략 300여 회사가 있다. 그 가운데 해드림출판사 사무실은 10층인 천사(1004)호이다. 사무실 호수가 천사이다 보니, 우리 사무실보다 훨씬 쾌적한 사무실을 봐도 부럽다는 생각은 별반 안 든다. 다만, 딱 한 곳이 있는데 사무실 크기가 우리 두 배 정도인데다 간판이나 출입문도 품위가 있어 보이는 회사이다. 그런 것보다 사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게 사무실 위치이다. 세 대의 엘리베이터에서 문이 열리면 바로 정면인 것이다. 늘 책 홍보로 갈증을 느끼는 나로서는, 그 회사 출입문 앞이 언제나 부럽다. 신간 표지 하나를 붙여놓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이 바로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직원은 밖에서 천사실로 들어올 때마다 주문을 외어야 한다. 출근할 때는 물론, 일하다가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잠시 쉬러 나갔다 들어오면 반드시 천사실 앞에서 중얼거려야 한다. 

‘책이여, 일어서오!’

모두 하루에도 몇 번씩 주문을 외는 것이다.

주문을 외지 못한 직원들은 절대 들어올 수가 없다.

올해 초 천사실을 지키는 도어록이 고장 났다.

우리가 이 건물로 이사 올 때 물려받았으니 꽤 오래 대문을 지켜온 셈인데, 재작년부터 비실거리다가 새해 들어 끝내 생을 마감한 것이다. 마침 새해도 되고 하여 빨간색의 예쁘장한 도어록으로 바꾸었다.

새 도어록을 달면서 마땅히 비밀번호도 바꾸었다. 

7261545

직원들에게 이 숫자는 안 알려주었다.

우리 비번은 ‘책이여 일어서오’야, 한마디만 던졌을 뿐이다.

나를 닮은 직원들은 금세 알아들었다.

2018년 1월, 우연히도 금고가 먼저 들어오고 천사실의 비밀번호가 곧 바뀌었다.

그런데 어쩌나. 금고든 천사실이든 비밀번호를 다 까발려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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