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사무실과 어머니가 있는 시골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하는 중이다. 6월 7일 어제 순천에서 올라왔다. 시골에도 컴퓨터가 있으니 서울 사무실 직원들과 소통하며 일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하지만 저자들과 미팅도 해야 하는 등 서울 사무실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다. 서울로 오자마자 어머니 생각이 끈하다. 아픈 몸으로 내가 없는 동안 어찌 지내실까. 혼자 계시면 제때 식사도 안 챙길 텐데….
밤이면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시는 채 좌골신경통으로 내뱉는 어머니의 신음이 귓가를 맴돈다. 잠을 자다 안방에서 신음이 들려 방문을 열어보면 어머니가 통증으로 침대에 앉아있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무너질 가슴도 없는 가슴에서 소소리바람이 친다.
사무실에서 자고 일어나 유투브에서 묵상하기 좋은 성가를 틀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성가가 가슴으로 배어들어 파문을 일으킨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어머니가 내게만 특별한 사랑을 베푸는 것도, 내가 어머니를 남달리 섬세하게 챙기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와 떨어져 있으면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단언컨대 나는 효자가 아니다. 어쩌다 보니 며느리와 손자를 당신과 인연의 끈을 맺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 싶다. 나의 원초적 외로움과 어머니를 향한 여러 죄책감, 어머니가 지닌 슬픔을 향한 연민이다. 한 가지를 추가하자면 나의 자존심이 아닌가 한다. 내 어머니의 존재가치와 어머니의 행복이 여느 사람보다 덜해서는 안 된다는….
서울로 오는 KTX 안에서 나는 내내 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며 끼니마다 밥을 짓고,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하는 외에는 특별히 해 드린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남짓 서울 사무실에서 머물다가 다시 내려간다. KTX 안에서 다시 내려가면 어머니께 내가 할 수 있을 듯한 간단한 음식을 메모해 보았다. 무밥, 콩나물밥, 계란밥, 부추밥, 제육볶음, 된장국, 콩나물국, 짜장, 잔치국수 등 제법 할만한 음식이 적힌다. 양념장 등은 만들지 못하면 마트나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될 일이다. 무엇보다 다음 내려가서는 일주일에 한 번은 시장을 다녀오기로 마음 먹는다.
지금까지 두어 달 동안은 어머니와 나의 동거 적응기간이자, 시골에서 출판사 업무를 보는 적응기간이었다. 이젠 어머니를 위해 적극적으로 요리도 하고, 나를 위해 운동도, 신앙도, 글쓰기도 활기차게 꾸릴 생각이다.
처음 어머니를 위해 서울과 시골 이중생활을 결정할 때, 사실 나는 어머니와 아기자기한 행복을 꿈꾸었다. 늙으신 어머니와 60대의 아들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하지만 정작 내가 시골에서 머물기 시작할 때 어머니의 통증이 시작되었고, 어머니를 모시고 시내 병원을 찾아다니기 일쑤였다. 뇌종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형을 간호하다가 얻은 통증과 신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어머니와 생활하며 발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름대로 적응기간이 끝났으니 우울한 날보다는 생기 있는 날을 만들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