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 코로나19로 팩스가 멈추다

by 해드림 hd books


밤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할 때면 사무실에서 잠을 청한다. 13년여 동안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집에서 자는 날보다 사무실에서 잠을 잔 날이 더 많았을 것이다.

사무실에서 잠을 자는 날이면 새벽 두 시쯤 팩스가 작동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듣게 된다. 서점이나 총판 같은 데서 보내오는 책 주문 팩스다. 이 시간부터 아침 9시까지 팩스 들어오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귀가 아프도록, 짜증이 나도록 들렸으면 좋으련만 문득, 문득 들려올 뿐이다.

팩스 소리가 들리면 저 팩스에는 몇 권의 책 주문이 들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결에도 하곤 한다. 곤한 몸을 뒤척이면서도 기대감이 일렁인다.

코로나 사태 이후 두어 달 동안 팩스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아침마다 정리하는 도서 주문서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난다. 아니 이제는 한숨마저 말라버린 듯한 심정이다.

어제는 드디어 팩스조차 멈추어버린 날이었다. 단 1권 주문이 있어도 서점에서 매일 아침마다 보내주던 책 주문량의 문자 메시지도 굳게 침묵을 지켰다.

안도현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고래를 기다리며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부시기 전의 태양이 박힌 듯 떠있는 건너뜸 여의도 하늘을 바라보며, 베란다에서 아직 끊지 못한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태양이 뜨는 한, 내가 게장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의 고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고 떼 지어 올 것이다.

지금은 잠시 숨을 참고 있을 뿐이라고, 이제 곧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한동안 참았던 숨을 고래처럼 내쉴 거라고,

그리고 힘차게 브리칭도 할 것이라고….

팩스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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