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만의 작품 색깔이 뚜렷하고
작품 한 편마다 삶의 철학이나 지혜가 건네는
메시지가 선명하다
이번 작품집 「빈 들의 향기, 백비(白碑)」의 펴내는 글에서 저자는 ‘이번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라는 표현을 썼다. 그동안 임병식 선생님의 작품집을 여러 권 출간하였고,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문인으로서의 창작 열정을 지켜본 나로서는 이 ‘마지막’이라는 표현이 어쩐지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임병식 선생님의 수필 사랑과 열정은 소리 없는 강물처럼 도도(滔滔)하게 흘러왔고, 또 그리 흘러가리라 믿는데, 어느새 ‘마지막’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약해지신 것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임병식 선생님의 이 표현을 어느 가수의 노래 제목인 ‘다시 시작처럼’으로 받아들인다.
「빈 들의 향기, 백비(白碑)」는 수필 ‘빈들의 체취’에서 작품집 표제로 뽑았다. 이 수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비(白碑)’는 비문이 없는 묘비석을 의미한다. 내세울 게 없어서 백비를 세운 게 아니라 겸손의 의미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천금 같은 묵언(默言)의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빈 들의 향기, 백비(白碑)’는 수필이 지닌 품성과 수필가 임병식 선생님의 품성을 닮은 듯하여 표제로 뽑게 되었다.
임병식의 수필 세계
「빈 들의 향기, 백비(白碑)」의 원고를 정리하다가, 10여 년 전 필자가 쓴 ‘임병식의 수필 세계’라는 글의 서두를 읽어 보니, 작품의 안정성이나 탄탄한 수필 문학성은 예나 지금이나 신기하게도 흔들림이 없다. 그만큼 임병식 수필가의 수필들은 경지에 이르렀고, 자기만의 수필 세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1)
임병식 수필가의 작품들은 대체로 리드미컬하면서도 선명하다. 어느 한 부분에 치중되지 않고 삶과 사물의 희노애락(喜怒哀樂) 다양한 모습을 심도 있게 그려낸다. 연륜도 연륜이려니와 작가가 말하는 ‘글쓰기의 다양한 시도’가 아닐까 한다. 해학적으로 다가와 슬며시 미소 짓게 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묵중한 필치로 삶을 처연하게 토로해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불의에 일갈하는 모습이어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돌아보며 깊은 성찰을 하게 한다. 이러다 보니 다각적인 삶과 사물의 이면을 간접체험 할 수 있고, 새 작품이 보이면 이번에는 어떤 유형의 작품일까 먼저 궁금해진다.
2)
수필을 쓰면서 항상 어렵게 느끼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필의 생명력 창조다. 소재가 되는 사물을 단순히 묘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눈을 통해 일상적 사유를 뛰어넘은 자기만의 특화된 철학을 불어넣을 때 수필은 독자들의 가슴에서 살아 숨 쉬게 된다. 공유할 수 없는 순 주관적 사유로만 풀어 간다면 그 수필은 요절하고 말 것이다. 백 년 전 작품이라 해도 시대를 초월해 되새김질되는 수필을 보면 대개는 주관적 객관화된 사유로 흐르며, 묵시적이어도 독자에게 뭔가 툭 걸리는 옹이가 있다. 세월이 흘러도 퇴화되지 않는 그 옹이가 수필을 장수하게 만든다. 옹이를 심어 수필의 생명을 창조하는 일이 내게는 무엇보다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종종 죽은 수필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넘치는 샘물을 퍼내야 한다
저자가「빈 들의 향기, 백비(白碑)」를 발표하며 밝히는 소회는 수필을 좋아하는 누구나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만한 내용이다.
[넘치는 샘물을 퍼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데로 흘러서 옷자락을 적시게 된다. 마찬가지로 작품도 넘치면 흩어지기 쉽고 비단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생각의 흐름을 막아놓아 자꾸만 글을 쓰는데 신경이 쓰이게 한다.
그간 나는 열네 권의 수필집을 냈다. 그렇다고 만족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낼 때마다 미흡하여 부끄러움을 느낀다. 사람이 어디 한 군데라도 특출한 데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의욕을 앞세우나 태작만 내놓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심마니가 노상 허탕을 치면서도 산에 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듯이 나도 컴퓨터 자판기 앞을 떠나지 못한다. 열심히 쓰면 혹여 좋은 작품 하나쯤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중략
나는 “문여기인”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글과 사람이 같다는 해석의 측면을 넘어, 바로 글은 그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까닭이다. 따라서 글은 허황되게 과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내숭이 없는 글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비교적 그 기준에 맞추어 글을 써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뛰어나서 주목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후대인에게 하나의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살아온 한 시대를 내 글을 통해 엿보고 느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