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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순신 죽음 사실일까

by 해드림 hd books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순신은 왜 제2차 출전에서 적의 탄환에 맞았나?

국정호 ㈜한화 종합연구소 책임연구원•[세종과 이순신, K 리더십] 저자

1592년(임진년) 5월 초 제1차 출동 후 이순신은 예하 제대에 “배들을 더한층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事變)에 대비하라”고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그로부터 20일 후 이순신은 다시 첫마음에서 해전을 준비하여 제2차 출동을 감행하였다. 경상우수사(원균)로부터 왜적이 나타났다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인데, 병법을 잘 아는 이순신은 이번 출동에 지난 1년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바다의 요새, 거북선‘을 참전시킨다. 이때는 임진년 음력 5월 29일로, 지금의 양력 7월 8일경이다. 평년의 기상을 적용하면 6월말 장마철이 막 지나고 찌는 듯한 더위가 시작될 무렵이다. 이순신은 제2차 출전(5월 29일 ~ 6월 9일)에서 10일간 4차례의 해전을 치렀다. 사천해전(5.29), 당포해전(6.2), 당항포해전(6.5), 율포해전(6.7)이 그것이다. 제2차 출전에 대한 세부 내용은 이순신의 <장계>와 이항복의 “고 통제사 이공 유사”를 읽어야 유익하다. 여기서는 이항복이 적은 유사를 중심으로 ① 사천해전, ② 당포해전, ③ 당항포해전을 리더십 측면에서 핵심 위주로 살펴보고, ④ 그 의의를 더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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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해전 : 거북선의 첫 출전

공(이순신)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공을 발로 차서 일으키며 말하기를, “적이 쳐들어왔다”고 하므로,공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재촉하여 전함 23척을 거느리고 노량에서 원균과 만나고 보니, 적이 과연 쳐들어왔다. 그래서 처음에 한 번 교전하여 적선 한 척을 불태워 부수고 적을 추격하여 사천의 바다 가운데 이르러서 멀리 바닷가의 한 산을 바라보니, 적군 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긴 뱀의 형상을 한 진형)을 치고 있고 그 밑에는 적선 11척이 언덕을 따라 열을 지어 정박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조수가 이미 밀려 나갔으므로[썰물]항구의 물이 얕아서 배가 더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거짓 후퇴하는 척하면적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해 올 것이니, 지금 계책을 써서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한 다음 우리가 거함으로 그들을 요격한다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다”하고, 마침내 뱃고동을 울리며 배를 돌려 후퇴하니, 1리(里, 400m)도 채 못 가서 적이 과연 배를 타고 추격해 왔다.

공이 일찍이 본영에 있을 적에 ㉠매일같이 왜구를 걱정거리로 여기어, ㉡지혜를 창출하여 종래의 것과 달리 새로운 방식의 군함을 제조했는데, 위에 덧판을 설치하여 형상이 마치 엎드린 거북과 같았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그 ‘귀선(龜船)’을 돌진시켜서 먼저 적진에 시험하여 적선 12척을 불태우니, 남은 적들은 멀리 바라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만 외치고 있었다. ㉢한창 싸울 적에 적의 탄환이 공의 왼쪽 어깨에 적중하여 등쪽까지 관통하였는데, 공은 그래도 활을 잡고 화살을 쏘면서 싸움을 독책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다가 싸움이 끝난 뒤에 공이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탄환을 후벼 빼내게 하자, 온 군중이 그제야 비로소 공이 탄환을 맞은 사실을 알고 모두 깜짝 놀랐다.

사천해전에서 처음으로 거북선(귀선)이 참전하여 그 성능을 발휘하였다. 이때부터 거북선이 선봉에 서서 적의 진형을 교란하고(기공법), 판옥선이 후위에서 함포로 지원하는(정공법) 해상전 형태가 자리를 잡았으며, 상대속력이 빠른 적선을 큰 바다로 끌어내어 제압하는 유인 전술이 효과를 보았다.

여기서 이항복이 전하는 여러 장수들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이순신은 본영에 있을 때에 ㉠ 매일같이 왜구를 걱정거리로 여기어, ㉡ 지혜를 창출하여 종래의 것과 달리 새로운 방식의 군함(거북선)을 제조했다는 사실이다. ㉠ 이순신의 머릿속은 오직‘적에 대한 걱정’뿐이다. 그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제압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형태의 전투를 해야 하는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이순신은 과연 병법의 대가답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 지혜를 창출하여 종래의 것과 달리 새로운 방식의 군함, 거북선을 만들게 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거북선은 뜻하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고 준비가 안 된 곳을 공격하는[出其不意 攻其無備, 출기불의 공기무비] 기공법(奇攻法)의 무기체계이자 적들을 두려움에 벌벌 떨게 만드는 심리전선(心理戰船)이었다.

이 사천해전에서 적과 너무 가까이 접근했던 이순신과 나대용 등이 적의 흉탄에 맞아 중경상을 입었으며,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상처가 아물지 않아 이듬해(1593, 계사년) 3월까지 치료에 고생하면서 10개월간 활을 쏘지 못하였다. 몸의 밸런스가 무너진 이순신은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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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해전 : 판옥선과 안택선의 첫 싸움

다시 진군하여 당포(唐浦)에 이르니, 또 적선12척이 강가에 나누어 정박해 있었는데, 한 중앙에 대선(大船,안택선)한 척이 있어 위에는 층루를 설치하고 밖으로는 홍라장(紅羅帳)을 드리웠는바, 여기에는 적추 한 사람이 금관에 비단옷을 착용하고서 여러 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이 여러 장수로 하여금 노를 재촉하여 곧장 돌격하게 하자, 순천부사 권준이 아래에서 쳐다보고 활을 쏘아 그 적추를 적중시키어 화살을 맞자마자 곧바로 고꾸라지니, 온 군중이 서로 경하하였다. 이날 저물녘에는 사량도 앞바다로 돌아가서 진을 쳤는데, 군중이 밤중에 놀라서 요란하여 마지않았으나, 공은 가만히 누워서 일어나지 않다가 한참 뒤에 사람을 시켜 방울을 흔들게 하니, 온 군중이 그제야 진정되었다.

6월 2일, 왜적들이 당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0시쯤 당포에 도착하면서 당포해전은 시작되었다. 300여 명의 적들은 성내에서 분탕질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험지를 의지하고 조총으로 공격해왔다. 왜선 아다께[安宅船, 안택선]가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높이 6~7미터 정도되는 층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좌수영 이순신 함대는 먼저 거북선으로 층루선을 들이받으면서 용머리 입으로 현자총통을 쏘고, 또 천자·지자총통, 대장군전을 쏘아 그 배를 깨뜨렸고, 이때 첫 출전한 중위장 권준(순천부사)이 활을 쏘아 적장을 고꾸라지게 한다. 당포는 통영의 미륵도 서쪽 포구(지금의 삼덕항 인근)이다.

또 여기서 ‘군중에서 소란이 일어났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것은 일종의 전쟁공포증(戰爭恐怖症, Warphobia)이었다. 전장의 공포는 몸 숨김, 명령 불복종, 기절, 전장 이탈, 자살 등과 같이 전장의 군기를 문란케 하고, 전투력을 심각하게 저하시키는 부정적인 효과를 유발한다. 따라서 지휘관들이 자신이 느끼는 전장 공포를 스스로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구비함과 동시에 부하들의 전장 공포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목숨을 건 전투를 계속 수행하여 피로한 상태에서, 왜군의 접근 여부를 알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깜깜한 야간에 발생할 수 있는 소요(騷擾)였다. 전쟁 경험이 없었던 병사들이 몇 차례 해전을 치렀는데도 왜 수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전투 경험이 있었던 이순신은 방울을 울려 병사들의 공포심과 두려움을 진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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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항포해전 : 독 안에 든 쥐를 잡는 방법

그 후 6월4일에는 당항포 앞바다로 진군하여 나갔는데,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서 함께 모였다. 이에 앞서 여러 장수들이 항상 고군(孤軍,홀로 편성된 부대)으로 깊이 들어온 것을 걱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억기가 온 것을 보고는 모두 사기가 증가되었다. 그 이튿날(6.5)에 제군이(도내포 협수로를 통과해)외양(당항포의 넓은 바다)으로 나가니, 여러 적들이 당항포 앞 포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공(이순신)이 먼저 초선(哨船,경계 및 순찰선)을 보내어 가서 형세를 탐지하게 했는데, 초선이 겨우 해구에 나가자마자 즉시 포를 쏘아 변고를 알리었다.

그러자 제군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배의 수미(首尾,선수와 선미)를 마치 고기를 꿰듯이 서로 연결시켜 나아가(종렬진)소소강(召所江,고성천)에 이르니, 적선26척이 항구 가운데 나열해 있었는데, 중앙에 있는 한 대선은 위로는 3층의 판각을 설치하였고 밖으로는 흑초장(黑綃帳,검정색 장막)을 드리웠으며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웠는바, 멀리서 바라보니 장내(帳內)에 시립하고 있는 모양이 희미하게 보이었다. 그래서 그가 두추(頭酋,우두머리)임을 알고는 수합(數合)도 싸우기 전에 공이거짓 패하여 후퇴하니, 층각의 대선이 공이 패하여 후퇴하는 것을 보고는 돛을 들고 곧바로 나오자, 제군이 협력 공격하여 예기(銳氣,날카로운 기세)를 타서 그를 붕괴시켜 버리니, 적추는 화살에 맞아 죽었고 적선100여 척을 불태웠으며, 적군의 목210여 급(級)을 베었고 물에 빠져 죽은 적군도 매우 많았다.이 일이 알려지자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에 승진되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함대와 처음으로 연합하여 싸운 당항포해전은 그 지형상 사람의 위장처럼 생겨서 꼬불꼬불한 협수로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바다가 펼쳐지지만, 외해로 나가는 길이 없어 다시 들어온 협수로로 나올 수밖에 없는데, (지금도) 고성땅 도내포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바다와 안쪽으로 고성천(옛 소소강)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처음 오는 왜적선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들 수 있었다. 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상륙하여 백성들을 도륙할 것을 염려한 이순신은 적선 1척을 남겨두고 당항포 입구인 도내포구로 돌아 나왔다가 이튿날 새벽에 방답첨사(이순신)를 다시 쳐들어가게 하자 적들이 그 한 척에 모두 타고 나오므로 격파하였고, 그 안에서 일본군 3,000여 명의 혈서가 담긴 ‘분군기(分軍記)’를 발견하여 이순신은 왜군들의 전쟁모의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었음을 직접 확인하였다. 제2차 출전으로 <장계(당포파왜병장)>에는 72척의 적선을 분멸(焚滅)하였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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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출전의 의의:점입가경 해전의 숙달

전쟁이라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이순신은 적의 목표물(Target)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도 보듯이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전쟁 수행개념은 제일 먼저 상대의 리더십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현대의 ‘전략적 동심원이론’을 보면, ㉠ 리더십, ㉡ 경제시설(국가보호시설), ㉢ 인프라(도로 등 기간시설), ㉣ 인구, ㉤ 적군 순으로 정밀유도탄과 스텔스기를 이용하여 타격한다는 개념이다.

사천해전에서 최고지휘관 이순신은 적의 흉탄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 조금만 자세가 높았다면 적의 흉탄은 심장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또 이때 적이 의도적으로 이순신을 노렸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창 전투 중에 최고지휘관이 왜적과의 근거리에서 조총에 맞은 것이다. 이순신은 전투 중에 제 한 몸을 잊고 전선을 지휘하면서, 또 위 ①-㉢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활을 잡고 화살을 쏘다가, “한창 싸울 적에 적의 탄환이 공의 왼쪽 어깨에 적중하여 등쪽까지 관통하였는데, 공(이순신)은 그래도 활을 잡고 화살을 쏘면서 싸움을 독책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면, 그럴싸한 전쟁영화에나 나올법한 위험천만하고 다분히 무모한 리더의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언제나 자기 스스로 활을 잡고 부하들과 함께 활을 쏘니, 장수들이 팔을 붙들고 장군(이순신)이 몸을 보호하고 활쏘기를 멈추길 간청했으나, 이순신은 “나의 목숨은 저 하늘에 달려있다. 어찌 너희 장병들만 적을 감당하라고 하겠느냐”고 하였다. 그렇게 싸움을 독려하다가 이순신은 근접전에서 적의 흉탄에 맞은 것이다.이순신의 담력과 전투감각, 그리고 솔선수범은 이후의 전투에서 부하 장수들을 분발시켰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당포해전에서는 순천부사 권준이 뛰어난 활솜씨로 적장을 쏘아 떨어뜨렸고, 당항포해전에서는 방답첨사 이순신이 기지를 발휘하여 적선 한 척을 남겨두고 퇴각한 후, 다음날 새벽 왜적들의 잔당을 바다에서 모두 소탕하였으며, 율포해전에서는 사도첨사 김완, 우후 이몽구, 녹도만호 정운이 적선을 끝까지 추격하여 궤멸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이순신은 예하 장수들의 전투감각을 깨우고 큰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그리하여 제2차 출전을 또 하나의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한편, 제2차 출동 첫 싸움인 사천해전에 첫 출전한 거북선은 적에게는 무시무시한 전투함으로 기억될 비장의 무기였다. 또한 전라좌수군과 전라우수군의 연합함대 형성은 이후 해전에서의 사기 증대와 승리를 더욱 공고히 하는 중요한 촉진제가 되었다. <난중일기(임진/06/04)>에는 “정오가 되니 우수사(이억기)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돛을 올리고서 왔다.진중의 장병들이 기뻐서 날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순신은 적선에 사로잡혀 포로된 우리 백성들의 말(정·첩보)을 잘 헤아려 듣고 활용하였다. 이순신의 경청(傾聽), 특히 당항포는 외해에서 보면 그 내해에 왜적의 존재 여부를 전혀 알 수가 없는 해역인데, 거제에 사는 귀화인 김모가 당항포에 왜적선이 있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도내포구를 통해 협수로를 타고 들어가 당항포에서 독 안에 든 쥐새끼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사천해전과 당항포해전에서 이순신이 구사한 유인전술은 한산대첩에서 적을 유인하여 학익진을 펼치는데 예행연습이 되는 귀중한 실전이었다. 노선시대의 함선이 (특히 속력이 왜선보다 느린 판옥선이) 적을 유인하는 기동을 하면서 적의 사정권에 들어가기도 하고 급히 선회하여 적을 공격하다보니 적의 포화에 아군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제2차 출전에서는 이억기의 전라우수군과 연합함대를 형성하게 되면서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은 어느 정도 해상전투의 자신감도 확보되었고, 판옥선과 거북선을 활용한 전투방법도 차츰 실전에서 숙달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리더십-무기체계-전략전술의 트리니티 관점에서 제2차 출전을 살펴보면, ①리더십 측면에서이순신의 담력과 전투감각, 솔선수범과 경청을 통해 카리스마 넘치는 현장지휘관의 진면목(眞面目)을 볼 수 있었으며, ②무기체계 측면에서거북선의 첫 출전과 그 쓰임을 살펴서 ‘임기응변을 무궁하게 하는’ 거북선의 진가(眞價)를 확인하는 순간이었고, ③전략전술 측면에서 선회 기동성이 좋은 판옥선을 활용하여 상대적으로 빠른 적선을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적을 일망타진하는 묘책(妙策)을 창출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칠흑 같은 밤이 찾아오면 장병들의 막연한 두려움은 순간 증폭되어 군중(軍衆)에서 소란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병사들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시간 속을 견뎌내다 보니 싸움이 더해 갈수록 군영(軍營)에는 전쟁공포증이 거침없이 확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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