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 다가오면 그동안 안 밝혀진 여러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곤 한다. 작년 가을쯤 이상범 시인의 전집 원고를 정리하다가 기사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이상범 시인의 5.18 상처를 담은 14편의 시리즈 시 [들풀 소사(小史)]를 소개한 기사였다. 1989년 8월 25일 금요일자 충청일보에서 이상범 시인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아픔을 담은 시리즈 작품 [들풀 소사(小史) 14편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 기사가 그것이다. 1989년이면 전두환 군사정권을 이어 받은 노태우 정권 때이다.
1 충청일보
당시 충청일보 박용삼 문화부장은 ‘문화산책’ 코너에서 ‘시대 상황 외면 않고 시화로 증언’이라는 제목에서 녹원 이상범 시조시인의 문학 세계를 소개한다. 이는 1989년 5월 25일 출간된 이상범 시집 「시가 이 지상에 남아」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박용삼 문화부장의 지면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6.25·광주사태 과감히 조명’이라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해설해 간다.(당시만 해도 지금의 공식 명칭인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로 지칭하였다.)
시집 「시가 이 지상에 남아」에 실린 [들풀 소사] 시리즈에서 서시 ①②③, 한 그리고 아픔 ①②③④⑤, 한 세월 ①②③④⑤⑥ 등 14편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광주사태의 비극과 한, 문제점을 시조라는 그릇에 담고 있어 주목케 하고 있다. 물론 광주사태의 비극성과 문제점을 다룬 시 또는 시조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인이 지켜본 그리고 가슴으로 느낀 광주사태의 어제와 오늘은 또 다른 차원에서 시화 됐다는데 큰 가치를 두고 있다. 이렇게 조용히 그리고 진솔하게 그날의 한과 아픔을 우리에게 시화시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그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들풀 소사’는 시인이 1985년 썼다고 알려져 있다).
들풀 小史
-한 그리고 아픔① 전문
안개속 땅덩이 하나
침몰하듯 가라앉는다
한번은 떠난다 해도
지금 우린 썰물이고
거둬 일 곡진한 소임만
눈물로써 적시느니.
소용도는 하늘이다
쓰러져 묻혀버린
질근질근 풀뿌리는
세상 들어 눈을 뜬다
그 보다 떠도는 회오리의
넋풀이는 밤을 날고.
피멍울 울멍 울멍
묵언은 지층을 가른다
꽃대를 거머쥔 바람
불지르는 진다홍을
선소리 목청 돋우던
평원 하나 누웠다.
1980년대초의 광주史, 마구 짓밟힌 [들풀]의 비명과 분노, 억울함과 고통의 소용돌이를 한 편의 시조에 담아 이 만큼 史實을 증언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용기이다. 그는 그 시대의 [피멍울]을 뼈아프게 노래했고 그러면서도 [선소리] 목청 돋우던 평원 하나 누워 있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들풀 小史
-한 그리고 아픔② 전문
잠 안 자는 들풀들은
목 놓아 울지 않는다
머릿결 빗어 올리며
서로 볼을 부비며
다독여 일구는 여울
옥돌 깨듯 반짝이고-.
풀 위에 풀이 눕고
흙 위에 흙이 얹혀
싸하고 차게 흐르는
전류처럼 아파와도
들풀은 들풀끼리 엉기어
곤한 잠을 포갠다.
여기서는 극복의 의지가 [선소리]로 눈물 나게 한다. [옥돌 깨듯 반짝이고-]는 깨어지는 아픔이면서도 깨어난다는 숭고함을, 그 같은 민초들의 저항을 암시해준다. 그렇기는 하나 부제인 [한, 그리고 아픔]이라는 말이 예시해 주고 있듯이 민초들의 그 저항의 바닥에는 퍼런 멍이 지워지지 않아 마냥 처절하고 끝닿을 길 없는 사무침이 일고 있다.
2. 서벌 시인의 작품해설 중 일부
시집 「시가 이 지상에 남아」의 작품해설에서 서벌 시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들풀 소사]에서 바람은 이유 있는 역사적 그 무엇이고 들풀들은 그것을 필연적으로 교감하는 사회적 존재 의미들이다. 이러한 목소리가 1980년 초반 무렵의 인쇄문화 지평에 저며진 목소리이고 기화 응력이었음을 상기해 봄으로써 일대 용단이 필요했던 일이었다.
그런 만큼 이 시조의 의도 속에는 우리가 왜 인간이며 오늘의 인간인가를 새겨서 듣게 된다. 부마 저항 현실, 그 좌정, 광주 일대가 돋을새김하여 올린 철저하면서도 처절한 몸부림과 희생, 여전히 거듭거듭 점철되었던 각처의 희생과 몸부림과 항변 섞인 인고 끝에 다물리던 입이 열리고 할 말들이 쏟아지는, 시대의 물고가 트여 민초 의식의 저력이 드디어 발양되는 오늘 이 시점이지만, 이 시조 역시 그러한 의식의 저력성이고 형상화이다. 작자 스스로도 이 시조는 광주의 현실이 가장 참담할 때 일으켜진, 그 시대의 의미 구조라 했다.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시기에 할 말을 묵정밭으로 묵혀둘 수 없었던 그는 비유의 묘가 갖는 방편을 취했던 것이며 그러한 방편들이 고리에 고리가 걸려 [들풀 소사] 14편 35수가 이루어진 것이다.
들풀 小史
-한 그리고 아픔① 전문(상단 참조)
피의 의미뿐이던 1980대 초의 광주史, 그 돋을 무렵에 쓴 이 작품을 통해서 허공에도 풀 속처럼 ‘여’(암초)가 있음을 시대고의 눈으로 확인해 보게 된다. 풀 속의 ‘여’는 배를 산산조각 나게 하지만 허공에 박힌 ‘여’는 역사의 진행을 박살 내고 만다. 경직화된 소수 집권 욕구가 당시의 ‘여’가 아니라 한다면 오늘의 우리는 다시 입을 다물어야 한다. 나침판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쓰지 못한 당시의 항진을 이 시조는 참으로 뼈아프게 노래했고, 그러면서도 ‘선소리’가 갖는 의욕을 늦추지 않았다.
들풀 소사
-한 세월⑥ 전문
비애도 상채기져
묻어나는 땅거미의
알 수 없는 흐느낌이
스물스물 일어서고
어둠도 크고 너르면
바다같이 뜨는 걸까.
달빛 먹인 들판은
저승의 푸른 빛을
쓸쓸한 공간에다
박쥐 같은 혼을 풀어
풀 풀 풀 떠다니는 방황을
쑥물처럼 삼킨다.
궤를 달리한 참담한 좌절감은 지구의 표면 곳곳에 누벼져 있다. 80년대 초의 광주사가 어떤 역사적 해명 위에 놓인다 해도 우선되어야 할 것은 민중이라는 이름이 여지없이 격파된 비극이고 슬픔이다. 무서웠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직도 가위에 눌린 나날이고 희생된 영혼들은 승천하지 못한 채 구천 방황의 끈에 묶여 있다. 오늘의 역사가 명예회복이라는 크나큰 짐을 풀어 응어리진 구석구석을 씻어 주지 못한다면 그 응어리는 갈수록 시퍼렇게 새순을 올려 우거질 것 또한 자명하다. 인용된 시조는 그 비애를 채택하여 공감적 동의를 구하고 있다. ‘풀 풀 풀 떠다니는 방황을/쑥물처럼 삼킨다’는 대목에 이르러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그것으로 [들풀 소사]를 일단락 지은 것은 와야 할 명예회복을 기다린다는 뜻이리라. 이처럼 모든 것이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는 것이 한국의 현대사이고 그러한 관점을 도외시하지 않은 데서 이상범의 시대정신은 [밤의 소사]를 따로 연계시켜 놓고 있다.
들풀 小史
-서시 ①
마른 풀 이마 위를
바람이 밟고 간다
강아지풀 위에 걸린
하늘이 흔들린다
바람과 하늘을 세우고
들풀들은 눕는다.
바람이 모여 앉아
곤한 숲에 별빛을 놓고
별빛들이 소근대며
들풀들과 몸을 섞는다
회오리 바람을 일구며
해산하는 풀내음.
강아지품 수염에
찔리는 어린 바람들
풀과 바람의 식솔들이
한참을 다투다가
햇살이 뿌리에 스미면
연록軟綠은 눈을 감는다.
시집 「시가 이 지상에 남아」 이상범 시인의 시선집이다. 이 시집 제목으로 취한 ‘시가 이 지상에 남아’는 명작 중의 명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