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의 영육이 그려내는 수필
보통 40대는 성숙을 말한다. 쉽게 세상일에 홀리지 않고 또렷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성숙함이다. 40대가 성숙이라면 7~80대는 해탈이지 싶다. 해탈(解脫)의 사전적 의미는 ‘번뇌의 얽매임에서 풀리고 미혹의 괴로움에서 벗어남’이다. 해탈은 열반과 같이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다. 일반적으로 해탈은 ’얽매임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모든 구속에서 완전하게 해방된 것이니 깃털처럼 가벼운 영육이다. 이러한 영육 상태에서 수필을 쓴다면, 안정혜 선생님의 이번 수필집 [베짱이와 일벌의 금혼식]에 실린 작품들과 같을 것이다. 이 수필집을 읽다 보면 진정한 수필은 불혹의 문학이 아닌, 종심이나 산수 문학이라 해야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40대 성숙을 초월한 감성과 지성이 수필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두 번 읽고 나서 이 수필집을 다 읽었다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저자는 [베짱이와 일벌의 금혼식]을 에필로그로 마무리하였다. 이 에필로그가 [베짱이와 일벌의 금혼식]을 더욱 빛나게 한다.
깔끔하게 꽃잎을 떨어내는 꽃들이 무대 배경
내 무대 배경이 바뀌었습니다.
귤나무와 삼나무 그리고 동백나무에서 꽃양귀비가 가득 핀 무대로 제법 화려합니다. 꽃술이 검정인 진빨강의 꽃잎과 흰색 사이의 진분홍, 연분홍, 연연분홍, 꽃술이 노랑인 주홍 꽃잎과 흰색 사이의 주황과 보카시된 색색의 꽃양귀비로 가득합니다.
그 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선 색상이 다양 우아하고 꽃 모양이 하늘하늘 참 예쁩니다. 꽃봉오리는 더 귀엽고요. 이 꽃은 질 때 질질 끌지 않습니다. 이틀 정도 피었다가 네 꽃잎이 마를 사이 없이 확 떨어져 버리니 깔끔합니다. 그것이 참 마음에 듭니다.
이 꽃들이 내 무대 배경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에세이스트의 김종완 선생님은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내 이미지와 혼동이 된다는 뜻이지요. 차라리 매화나 수선화라면 수긍하셨을 테지요. 사실, 이 꽃은 내 안에 내재된 숨은 색깔일지 모릅니다.
이 무대에 꽃양귀비만 피었다면 사치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흰 데이지가 무리 지어 함께 피니 화려함은 화사로 바뀝니다. 거기에 색색의 수레국화가 같이 핍니다. 화사함의 극치를 이룹니다. 벌이란 벌들이 다 모입니다. 전생(前生)이 있다면 나는 꿀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꿀벌이 나만큼 이 꽃들을 좋아하거든요.
이들의 꽃말이 위로와 위안 그리고 행복이고 인내와 평화와 희망이랍니다. 인생 희수(喜壽)를 지낸 노년이 이들 꽃말 덕에 화사한 한 폭의 수채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 수필집 「베짱이와 일벌의 금혼식」의 표지는 이 꽃양귀비꽃들로 장식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스마트 폰으로 우리 집 꽃들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이번 글은 ‘나’ 속의 ‘나’가 주류를 이룹니다.
제주의 자연 속의 나를 쓴 첫 번째 수필집 『꽃짐을 진 당나귀』의 표지화는 원로 수필가이며 문인화가이신 손광성 선생님이 ‘매화를 하나 가득 실은 당나귀’로 그려주셨습니다.
사람들 속의 나를 쓴 두 번째 수필집 『제5 계절』의 표지화는 최종태 교수님의 ‘축복’이란 그림으로 마리아가 장미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있는 그림입니다.
사실 내 인생이란 글에 표지화를 붙인다면 밀레의 ‘만종’으로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happy ending으로 끝나는 수필 속 신심 깊은 주인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정 그리고 금혼식
과연 Who am I?
나는 얼마나 나를 알까, 거울 속의 나는 진면(眞面)일까, 사진 속의 나는 누구일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나의 자화상은 한 개로 다 표현될 수 없는 일, 수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수십 개를 지닌 사람도 있을 것, 반 코호도 서른 장의 자화상을 그렸다 한다. 나는 철면피까지 쓴 일은 없었을까. 분명 있다. 때때로 타인의 부정적 행동을 보면서 그래, 바로 저게 내 모습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해 본다. 상대가 보여주는 부정적 요소를 나도 다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숨기고 감추며 살다 보니 때때로 속으로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who are you?’ 중에서)
때론 나도 나를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쓴 수필 전부를 짜 맞추면 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이 나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수필 속 자신의 성격이며 격조며 과거와 현재의 사는 모습과 억눌렸던 아픔도 양심과 라이프 스타일, 이 모두가 합해진 결정체가 ‘안정혜’일 것입니다. 아무리 글이 미화(포토샵)되었다 해도 추억도 나다운 것일 테고 생각과 유추나 상상도 나만의 모양새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타인의 눈으로 보는 나는 그저 일이(一二) 차원의 단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를 합한 글은 이미 삼차원을 넘어 사차원이 되었을 테니까요.
(who are you?)
동반자와 엮어 가는 나의 삶, 주인공과 많고 많은 조연과 얽히고설켜서 걸어가는 길, 꽃길일 줄만 알았습니다. 환상이었습니다. 신발이 달 듯 사랑과 신뢰는 세월과 더불어 닳아 버렸습니다. 차차 무미한 듯 무심하게 흐려갔습니다. 참 묘합니다. 무언지 모르는 물질이 사랑도 미움도 밀어내면서 덤덤해졌습니다. 미적지근하고 투명하나 끈끈한 물질이 두 사람 안에 차오르게 된 거지요. 정(情)이랍니다. 그럴 무렵 금혼식을 맞았습니다.
부부란 산과 강물
산은 물을 품어 생명을 잉태하고 물 역시 산을 품어 물길을 불립니다.
산은 물이 없으면 사막이요, 물은 산이 없으면 스밀 곳이 없습니다. 하나
산은 강물을 넘지 못하고 강물 역시 산을 넘지 못합니다.
부부, 산과 강이 만드는 오아시스
꽃이 피고 사랑이 영그니 아름답지 아니한가.
(‘베짱이와 일벌의 금혼식’ 끝부분)
남편을 보내고 참척의 슬픔에 버금가는 피눈물을 흘리는 친구가 있습니다.
백 일이 다 가도록 친구의 목에선 피맺힌 애달픈 소리만 새어 나올 뿐이다. 그래도 난 알아들었다. 마지막 인사 후 남편이 섬망에 들어갔음에도 그 밤 그녀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사는 외아들을 부르지 않았다. 이 천금 같은 시간을 어떤 누구와 함께하기도, 빼앗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남편의 입을 벌리고 적포도주 한 모금을 입에서 입으로 넣었다. 연속, 네 번을 넣어드렸다. 희미하게 넘어가는 소리까지 들렸다.
(‘사랑 그리고 마무리 이후’ 본문 중에서)
나는 그 친구가 남편 따라 죽을까 봐 마음 졸이며 이 년을 함께했습니다. 우리의 은사였던 그녀의 남편과 그녀는 여중 일 학년에 만나 여고 졸업반 때 사랑이 싹텄나 봅니다. 그분이 서울로 전근 가시고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만나 적지 않은 나이 차이와 여러 장애를 극복하고 결혼했습니다. 은사님은 아흔여섯에 한 보름 드러누워 계시다 아내 품에서 돌아가셨으니 행복한 분입니다. 친구는 이 년이 넘도록 무슨 추억거리만 보면 웁니다. 그런 날은 그녀의 전화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었구나.’ 직감합니다. 그녀의 아픔은 살아생전 그 좋은 말, ‘당신 멋져! 고마워!’란 말을 못 한 것까지 포함됩니다. 남편이 죽고 나서 백 가지, 만 가지를 후회하며 애통해합니다.
50여 년을 같이 살고도 지난날 못다 한 사랑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부의 애틋한 정인가 봅니다.
나는 친구를 지켜보면서 아, 그렇구나, 둘이 살아 있음이 진짜 행복이구나, 마음 깊이 느끼며 ‘그대 있음에’를 썼습니다.
인생길 굽이굽이 산마루
팔십 고개 다다르니
노을이 집니다
젊어서 보지 못했던 것
이제 보입니다
그대 있음에
햇살이 빛나고
달빛도 그윽
별빛은 영롱
내 인생도 화~안 합니다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음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이
의지할 수 있음이 축복이란 걸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는
科學徒
당신은 공과대학
나는 농과대학
인생 전반은 엔지니어로
후반은 그린피아로
인생은 순식간
젊음도 명예도 성공도
인생무상인데
그대 있음에
의미가 다릅니다
(‘그대 있음에’ 본문 중에서)
시역피야(是亦彼也), 피역시야(彼亦是也)
삶의 지침을 위해 오랜 세월 성서를 파고들었고 현자(賢者)들의 지혜를 배우고자 장자(莊子) 내편을 파고들었지만, 분위기만 파악했을 뿐, 무엇을 알아챘을까? 메타포와 패러독스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역설하십니다. 예수는 당시에 무식하며 가난했던 하층계급의 어부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장자는 예수보다 삼백여 년 전에 중국 전국시대를 살다간 지자(智者)였지만 시대를 넘어 두 분은 일맥상통하는 역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장자가 진인(眞人)이라 말하는 사람들은 겉모습이 어눌하고 절름발이 이거나 혹이 달린 조롱감인 불구자로 상상 초월의 인간상들입니다. 사실 그 진인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신인(神人)이었겠지만 전능한 신이 아니라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이 가고 덕이 충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장자 속의 장자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현자인 장자는 옻나무를 관리하는 하급 관리였습니다. 하나 자유를 누리고자 소요유(逍遙遊)를 지향하며 유유자적하고자 했습니다. 당연히 가난했습니다. 식구들을 굶기기 일쑤, 누렇게 뜬 얼굴에 누더기를 걸치고 우거에서 살지언정 초나라 대부가 찾아와 재상이 되어 주기를 간청했으나 거절했습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난세에 귀재인 그가 그 자리를 허락할 리 없었던 것. 그는 비단옷을 입은 거북이가 묘당(廟堂)에 갇혀 사는 것보다 진흙 속에서 꼬리 치며 사는 게 낫다고 했습니다.
장자 ‘덕충부’의 상상 초월의 인물들에 빠져 「역설적인 삶」을 썼고 그의 소요유 편에 반해서 메타포적「아름다운 소녀와 붕새와 청문회」를 썼습니다.
인생길엔 두 갈래 세 갈래 길이 나타나 헤매기 일쑤입니다. 살아보니 어느 길이 정답인지 헷갈립니다. 로마로 가는 길이 어디 한 길뿐인가요. 시역피야(是亦彼也), 피역시야(彼亦是也 : 장자 내편 제물이론에서)로 이것 역시 저것이요, 저것 역시 이것이란 뜻입니다. 다 상대적입니다. 실상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오면 며느리 말도 옳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면 때론 모르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공에도 정답이 없고 인생에는 더더구나 정답이 없습니다. 뒤집으면 정답일 수 있습니다. 성서는 그저 바르게 살라, 바르게 살라하니 그야말로 그 이상의 정답은 없습니다. 천사는 바르게 사는 사람과 함께하고 사탄은 재미에 빠져 취해보라 꼬시니 지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정답없다’ 본문 중에서)
세 권의 수필집을 내며 나는 나목이 되었습니다. 그렇듯 빈 마음으로 다시, 감자 고구마와 땅콩을 심고 고추며 마늘 양파와 김장거리와 콩, 팥, 옥수수를 심으며 갖은 채소와 블루베리와 복숭아와 매실과 사과와 대추의 수확을 기다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