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산, 용의 출현’ 개봉에 앞서 정조대왕의 이순신 평가, 정조대왕어제신도비
이항복은 이순신을 조선의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았습니다. 선조 또한 이항복이 쓴 이순신 유사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순신은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에 녹훈되었죠. '선무공신'은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운 장수 18명에게 내린 공신칭호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권율,원균과 함께 일등공신으로 책봉됐고 그중 제일 앞자리에 이름이 올랐습니다.
학자군주 정조는 누구보다 이순신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위대한 리더는 사후에도 그 영향력이 큰 법이죠.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00년이 되는 1792년, 정조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문무겸전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순신을 높이 평가했는데요, 정조는 이순신을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라고 손꼽으면서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룰만한 전략가이기에 흠모하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영화 한산 예고편 화면정조대왕의 이순신 평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절개와 의리가 있는 인물에 대해 높이 장려하고 표창하여 일찍이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촉한의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자웅을 겨룬다고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왜구를 토벌한 공로는 백세토록 영원히 그 덕택을 입고 있고, 변방의 방비를 계획 정립하는데 방략(方略)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그의 명성과 의열(義烈, 의로운 마음이 열렬함)은 아직도 사람에게 늠연히(위엄있고 기개가 높음) 흠모(欽慕)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영화 한산 예고편 화면앞선 왕들이 하사하고 추증(追贈, 죽은 뒤 품계를 높여 줌)하는 은전(恩典)은 더할 수 없이 극진하였으나, 문자로 새겨서 기리는 것은 아직 부족한 점이 있다. 내가 등극한 이래로 늘 사적을 모아 한편으로 편찬하고, 또 묘에 비석을 세우고 생석(牲石)신도비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아직까지 겨를이 없다가 근자에 와서야 비로소 이 일에 뜻을 두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정조는 이순신에 대한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직접 작성하였죠.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선의 국왕이 직접 적은 신도비문은 이순신과 같은 장수가 또 나타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특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또한 정조는 원균이 이순신의 통제를 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이순신을 중상(中傷)하였다고 언급하면서, 원균을 선무일등공신에 올린 선조와는 입장(立場)의 차이를 보입니다.
영화 한산 예고편 화면정조는 원균이 이순신의 통제 받는 것을 싫어하여 뜬소문으로 이순신을 중상했다고 하면서 원균을 도망하다 살육을 당한 비겁한 패장으로 취급하였고요, 반면에 정조는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조선 수군을 명량에서 다시 살려내고, 노량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은 이순신을, 충절을 높이고 무공을 휘날리는 ‘상충정무(尙忠旌武)의 영웅’으로 극찬하였죠.
참고로 이충무공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삼거리(三巨里))에 있고요 이 충무공 사당인 현충사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죠.
정조대왕어제신도비(正祖大王御製神道碑)는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요, 1979년 12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세운 비석이 별도로 세워졌습니다. <정조대왕어제신도비>를 읽어보면 이순신을 흠모하는 정조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한글로 번역한 어제신도비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자는 여해(汝諧)이다. 1545년에 출생, 어려서부터 기개가 높고 뜻이 컸으며 자라서는 무술이 뛰어났다. 1576년에 무과에 합격하고 국경지대의 군관으로 배치되어 여러 번 공적을 세워 그의 역량이 크게 알려졌다. 류성룡이 나라에 추천하여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일본에서 우리를 침공하겠다고 큰소리를 쳐서 일본과의 사태가 불안한 것을 느낀 공은 매우 걱정하여 밤낮으로 군대를 훈련하며 무기를 손질하고 전투와 수비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닦는 한편, 특별히 새로운 형태의 배를 고안하여 만들었으니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 같으므로 이름을 ‘거북선’이라 하였고, 이것으로 해전의 훈련을 쌓았다.
1592년에 과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일본군은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군대를 나누어 길을 갈라서 서쪽으로 올려 밀었다. 충무공은 곧 군대를 이끌고 옥포로 달려가서 적의 배 20여 척을 공격하여 불사르고,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과 노량에서 합세하여 적을 습격하고, 다시 사천으로 가서 또 10여 척을 불사르고, 군대를 당포에 주둔했는데
적선 20여 척과 마주쳐서 그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졸들을 무찌르고, 다시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와 당항포에서 합세하여 적의 우두머리가 탄 3층 건물로 장치한 배를 쳐부수고, 그들을 한산도로 유인하여 몰아넣어서 크고 작은 배 70여 척을 쳐부수고, 적을 추격하여 안골포에 이르러 또 40여 척을 불살랐다. 우리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적군은 겁을 먹고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영화 한산 예고편 화면전승한 보고가 올라가니 나라에서는 바로 관계를 정헌대부로 올리고 이듬해에 조정에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제를 신설하고, 공에게 본직을 그대로 가지고 겸임하게 하고 진영을 한산도로 옮겼다.
이때 원균은 공에게 절제를 받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마침내 뜬소문을 퍼뜨리어 충무공을 중상(中傷)하고, 중앙에서는 이를 곧이듣고 공을 잡아 올려 법관에 넘기고 원균이 통제사의 직을 대신 맡게 되었는데, 수개월 안에 우리 군대가 전패하고 원균은 달아나다 죽었다.
정부에서는 다시 공을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공은 수십 명의 기병을 데리고 순천부에 달려가서 병선 10여 척을 접수하고 여기저기서 다시 도망병을 수합하여 난도(어란포)에서 적을 격파하고 나서 또 벽파정 아래에서 30여 척을 쳐부수고 적의 장군 마다시를 죽였다. 적은 더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
영화 한산 예고편 화면1598년에 명나라에서 장군 진린, 유정, 등자룡 등이 전후하여 들어왔는데 충무공은 고금도에 나아가서 진린과 합세하였다. 진린은 공의 전술과 인격에 크게 감복되어 군사의 모든 기밀은 모두 공의 자문을 받아서 처리하고, 선조에게 “이순신은 하늘과 땅을 주름잡으며, 태양처럼 빛나는 인물”이라고 격찬하였고, 명나라 신종 황제에게 보고하여 충무도독(忠武都督)의 인수를 내리게 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관백 풍신수길이 죽고 소서행장은 곧 철군을 서둘러 곤양과 사천에 주둔했던 군대들에게 기일을 정하고 모두 노량으로 집결하게 하였다. 충무공은 진린과 함께 적을 섬멸할 것을 다짐하고, 밤중에 달아나는 적과 마주 싸워 배 200여 척을 불사르고 추격하여 남해에 이르렀을 때 적선은 명나라 군대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영화 한산 예고편 화면공은 이를 구하기 위하여 총알과 화살이 쏟아지는 속으로 뚫고 들어가서 한창 싸움이 이어 울렸을 때에 갑자기 적의 유탄을 맞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나이는 54세였다. 이듬해에 아산에 장사지냈다. 뒤에 벼슬을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하고,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덕풍부원군’에 봉하고, ‘충무’의 시호를 내리고, 그의 사당을 ‘현충사’라 하였다.
정조 때에 다시 벼슬을 ‘영의정’으로 올리고, 임금이 직접 신도비를 짓고 그의 시호에 따라서 비의 제목을 “충절을 높이며 무공을 휘날린다”는 뜻으로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 하였습니다.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장소 통영에서 한산도 가는 길 20분 풀코스 영상
https://youtu.be/4gjygk5THQ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