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경상도 수군이 무력함을 드러냄으로써 조선 수군의 존재 자체가 일본군에 의해 거의 무시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그들의 수군장수들을 육전에 참가시켜 한양까지 진입하였는데, 6월 5일 용인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협판안치)의 기병부대가 약 2천 명으로 4만 명의 조선군을 무찌르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런 와중에 벌어진 초기 일곱 차례의 해전에서 일본군은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에게 단 한 차례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이 있는 한 그들이 계획한 전쟁 수행이 불가함을 알고 한양까지 진격했던 일본 수군에게 조선 수군을 격멸하라고 지시하여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73척의 군선을 이끌고 견내량으로 진입한다. 그러나 미륵산에서 소치는 목동 김천손에게 그 규모를 들키고 만다. 이순신은 이 정보를 이용하여 적을 유인한 후 한바탕 큰 싸움을 계획하였다. 사도첨사 김완은 그의 <임진일록>에서, “당포에 이르러 밤에 전투에 대한 비밀 논의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92년 7월 7일 그날 밤, 김천손의 정보를 가지고 적의 위치와 규모를 정확하게 알게 된 이순신과 지휘부는 ‘비밀회의’를 거쳐 우리 함대보다 수적으로 많은 왜적들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How to Fight)’를 고민하고, 두려움과 적개심이 혼재하는 상황에서 예하 장병들을 독려하고 부하들의 몰입을 유도하였다.
임진년 7월 7일, <장계에서> (남해 창선도 앞바다에서 정박하다가 출항) 샛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하기 어려웠다. 고성 땅 당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기로 나무하고 물 긷고 있는데, 피란하여 산으로 올랐던 그 섬(통영 미륵도)의 목동 김천손(金千孫)이 우리 함대를 바라보고는 급히 달려와서 말하였다. “적의 대·중·소선을 합하여 일흔 여 척이 오늘 낮 미시(오후 두 시쯤)에 영등포(거제도 상단의 구영리) 앞바다에서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다”고 하므로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申飭)하였다.
영화 한산 예고편
1592년 7월 8일, 역사적인 한산대첩의 날이 밝았다. 이른 새벽 이순신은 당포항을 출항하여 미륵도를 중심으로 반시계 방향(CCW)으로 돌아 통영수로를 따라 북상하며 오른쪽에 한산도를 통과하여 견내량으로 향한다. 그날의 <난중일기>는 적혀 있지 않지만, <장계>를 통해 한산대첩의 숨 막히는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임진년 7월 8일, <장계에서>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러 있는 곳(견내량)으로 항해했다. 한바다에 이르러 바라보니, 왜선의 대선 한 척과 중선 한 척이 선봉으로 나와서 우리 함대를 몰래 보고서는 도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뒤쫓아 들어가니 대선 36척과 중선 24척, 소선 13척(모두 73척)이 대열을 벌려서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은 서로 부딪치게 될 것 같아서 싸움하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왜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다.
전날 밤의 작전 구상을 현장에 와서 현장 상황을 보고 재빨리 변경하는 이순신을 본다. 학익진을 펼치는 한산대첩은 견내량에 진입하여 환경과 상황을 판단하고 신속하게 수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산도는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뭍으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먼저 판옥선 5~6척으로 먼저 나온 적을 뒤쫓아서 엄습할 기세를 보이게 하니, 적선들이 일시에 돛을 올려서 쫓아 나오므로 우리 배는 거짓으로 물러나면서 돌아 나오자, 왜적들도 따라 나왔다. 그때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현자·승자 등의 총통들을 쏘아서 먼저 2~3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은 사기가 꺾이어 물러나므로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일제히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와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영화 한산
대장선에 타고 있던 이순신의 지시로 전 함선이 일제히 학익진을 펼치는 장관이 눈앞에 그려진다. “견내량에서는 바다가 좁고 항구가 얕아서 전투할 곳이 못 되니, 큰 바다로 유인해서 깨뜨려야 한다.” 왜적의 전선들을 한산도 옆 넓은 바다로 끌고 나오면서 우리 전선들을 넓게 펼쳐 적선을 보자기로 감싸는 형태를 취하게 한 후 전 함선을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일제회전(Turn)시킨다. 급히 조선 수군을 쫓던 왜 수군들은 조선 함선의 일제회전에 깜짝 놀라 전선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조선의 판옥선과 거북선이 가진 여러 함포가 불을 뿜으며 원거리에서 적선에 집중사격을 가한다. 학익진으로 인해 적선을 독에 든 쥐로 만들어 파괴시킴으로써 왜적들은 혼비백산하고 만다. 조선 수군의 함포 공격으로 왜선들이 파괴되고 침몰하는 상황에서 우리 수군은 왜선에 접근하여 계속해서 함포를 쏘면서 화살과 불화살을 마구 쏘아 적선의 돛과 격실 곳곳에 불을 지르고, 적들이 침몰하는 배에 겨우 의지해 몸을 숨기고 쉽사리 갑판 위로 나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적의 손과 발을 묶어놓고 일방적으로 때리는 형국이었다.
이 글의 출처 [세종과 이순신, K 리더십] 국정호 지음
한산대첩은 크게 ① 유인전과 이어지는 진형의 변경(학익진), 그리고 ② 함포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① 유인전은 <손자병법>에 등장하는 “솔연의 뱀”이 연상되고, ② 이어지는 함포전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방진(方陣)인 “팔랑스(phalanx)”가 떠오른다. ① 이순신이 해상에서 군사를 부리는 모습은 마치 솔연(率然)과 같은데, 견내량을 통과한 왜적들에게 추격을 당하는 상황에서 적들이 뱀(이순신함대의 진형)의 허리를 급습하려고 하니, 이순신은 적을 한산도 인근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후퇴하는 척하다가 일시에 반대방향으로 일제회전(TURN)하여 뱀의 머리와 꼬리가 (허리까지) 동시에 적을 대항하여 치는 학익진의 형태로 진형을 변경시켰다. ② 팔랑스는 적과의 근접전에서 아군은 방패로 방호하면서 긴 창으로 적을 찔러 공격하는 밀집대형인데, 이순신함대의 판옥선과 거북선은 튼튼한 함체로 인해 적의 총탄과 화살이 침투하기 어렵고, 또 지자·현자총통 등 함포의 운용으로 적의 사정권 밖에서 원거리 타격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순천부사 권준(權俊)이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 급을 베고 우리나라 남자 한 명을 빼앗았다. (중략) 그 나머지의 왜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 등은 전라좌도와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부수고 불태우니 화살을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놈 400여 명은 형세가 불리하고 힘이 다 되었는지 스스로 도망가기 어려운 줄 알고, 한산도에서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갔으며, 그 나머지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모두 14척) 등은 접전할 때 뒤처져 있다가 멀리서 배를 불태우며 목 베어 죽이는 꼴을 바라보고는 노를 재촉하여 도망해 버렸으나, 종일 접전한 탓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노곤하고 날도 땅거미가 져 어둑어둑하므로 끝까지 추적할 수 없어서 견내량 내항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영화 한산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은 ‘장단(長短)’, 즉, 적의 장점이 빠른 함선의 기동력과 조총과 칼, 왜인들의 무자비한 용맹함, 불리할 경우 인근 섬으로 상륙한다는 것을 잘 파악하여 적을 한산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하여 적의 장점을 줄여나갔고, 이어서 우리의 장점인 판옥선의 선회 용이성, 화포 운용성, 한번 승기를 잡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조선인의 신바람을 최대한 살려서 한산도 해상에서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왜적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어 역사적인 한산대첩(閑山大捷)을 완성하였다.
제3차 출동 상황도(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
이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을 통틀어 우리는 “한산대첩”이라고 부르는데, 이 한산도해전에서 적·아의 세력이 73척 : 58척이었음에도 이순신은 “일시에 거의 다 쳐부수었다”고 했다. 한산도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왜적선 59척을 쳐부수고 일본군 250급을 참획(斬獲)하였음에 반하여, 아군의 피해는 전라좌수군의 경우 전사자 19명, 부상자 114명이었으며 단 1척도 손실되지 않았다.
특히 이 해전의 특징은 학익진(鶴翼陣)에 의해 전력을 분산한 후 일제회전으로 포화를 집중하는일제회전 집중공격인데, 영국의 해전사가(海戰史家)인 발라드(G.A. Ballard)는 이순신이 해전술에 탁월한 전문가이기에 가능했다고 평가하였다. 당연한 말씀.
그때의 위기에 처한 순간에 큰 노를 저어서 함선은 모두 16점의 침로를 취하게 하여(180° 선회하여) 일본 추격선에 공격하였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에게는 이 기동이 지상에서는 간단한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해군 전문가만이 이 기동은 훈련을 쌓은 숙련된 함대의 표준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이 선회작전에 있어서 많은 적의 함선은 침몰되었고, 전진해 오는 조선군의 이물(함수)에 그들의 현측이 노출되고 있었다.
영화 한산
이런 통쾌한 대승의 직접적인 비결은 함선의 화력집중을 위해 해상에서 학익진(鶴翼陣)을 집행한 이순신의‘현장 리더십’결과였다. 한산도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이후 거제도 이서 해역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서해를 통한 왜군의 보급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후에 역사적으로 한산대첩을 고찰하여 T형 전술 등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지금 대한민국 해군은 충무공의 후예이다. 해군의 관함식이나 해상사열 등 주요 행사에서 이순신의 학익진을 해상에서 펼치는 장관을 재현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